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2003/12/02 19:01 | 교단일기
원두라는 걸 처음 마신 게 대학교 1학년때였던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쨌든 대학교때인 건 분명하다. 외 오촌 아저씨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시면서 집에 드립퍼가 생기게 되었던 것 같은데. 처음 마신 원두는 뭔가 보리차같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 커피전문점에서 마셨던 커피보단 좀 더 묽은 느낌.

커피중독을 몇 차례 겪고나서 대학교 3학년때에는 위경련에 토사곽란(..)까지 한 번 앓을만큼 커피와의 궁합은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A형 답지 않은 승부욕 때문에 커피는 내 좋은 친구였다. 오늘 아침방송에서도 나오더라. A형은 명예를 중시하고, 승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나. 그런 걸 보면 나는 어느 정도는 O형에 가까운 듯도 싶다. 지는 것은 정말 싫어하면서도 속으로 꾹꾹 삭이려고 하니까 말이다. 대학때 커피와 그렇게 붙어 지냈던 건 대학시절의 전공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수학을 잘한 게 아니었던 내가 어쩌자고 수학교육과에 들어갔었는지. 수학을 못하서 문과를 간다는 소리를 듣기 싫었던건지도 모르겠지만, 2학년때 자연계로 진학을 하고 나서 의료계쪽 직업을 다 지우고 나니 갈 곳은 이제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치의예과를 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내 시간을 갖고 싶었다. 5시에 퇴근하고,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책도 읽을 수 있을거고. 24살이면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뭐 그런 얄팍한 생각이 상당히 작용했을 거라는 이야기다. 27살이 될 때까지 꼬박 학교에 매여서 실험과 실습에 눌려 있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리고 오빠로부터 들었던, 의료계 특유의 남녀차별이 겁나기도 했었고.

뭐 그런 진학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야 물론 선생님이 되는 것이라서, 나름 만족한 결론이었는데... 진학하고 나니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왜 하필 수학인가. 발령이 바로 날 거라는 생각으로 수학교육과에 들어오긴 헀지만 나는 동기들에 비해서 이해하는 것이 한참 느렸다. 오히려 교육학이나 교양과목같은, 동기들이 버거워하는 과목이 내게는 전략과목이었다. 그나마 수학교육과에서 그정도 성적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런 덕분이었다.

그런 생활에 필수적인 게 커피였다. 수업을 마치면 보통 한 두건의 과외가 있고 집에 들어오면 밤 10시는 가볍게 넘었다. 그러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따로없이 한 학기에 서너번씩 시험을 치는 수학교육과의 수업을 따라가려면 잠을 안 자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커피를 좋아한다. 징하게도.
아침나절의 피곤을 쫓는 커피는 사실 그렇게 맛있지 않아도 좋지만, 친구들과 만나서 마시는 커피는 맛있었으면 한다. 바로 볶은 커피를 마실 수 없는 이런 고장에서, 에스프레소에 미친 장인이 살고 있지도 않은 이 곳에서 (어쩌면 있는데도 내가 모르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 맛있는 커피란 극히 찾기 어렵지만 말이다. 그래서 커피를 좋아하는 후배들은 때로 비웃는다. 별다방커피가 그게 커피야? 하고. 물론 그보다 맛있는 커피가 있다는 건 알지만. 나는 서울에 살지 않고, 그런 커피를 볶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도 시간도 없으며, 그런 커피를 보내줄 사람도 없다. 지금 가능한 가장 맛있는 커피가 그것이니까, 나는 그걸 마실 수 밖에.

지금 내 앞에는 맥널티의 모카가 있다. 아주 저가의 원두이지만, 그나마 매일매일 볶아주는 가게에서 산 것이다. 커피드립용의 주전자와, 황동으로 된 드립퍼와, 원두를 가는 그라인더는 언젠가는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금은 이 커피에 나름 만족한다.

아침이다.
그리고 오늘은 1교시에 수업이 없다.

누가 뭐래도, 가끔씩 이렇게 잠시간 여유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그 때 내 선택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3/12/02 19:01 2003/12/02 19:01
가끔 살다보면 가치관에 대해서 물음을 받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 때마다 한참 고민을 하게 된다. 열심히 살아야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친구들이 자랑스러워할 친구가 되자, 가족들이 자랑스러워할 사람이 되자... 뭐 이런 저런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이건 확실히 이상에 관한 것이고, 삶의 방식에 대한 거라면 한 마디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민폐끼치지 않고 사는 거예요."

민폐라는 말의 범위를 정하자면 상당히 넓을 것이다. 사람마다 어느 정도를 민폐로 보는 지도 다를 것이고. 나한테 민폐라는 것은 간단하다. 내가 당해서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 내가 남들에게 바라는 것을 남들에게 하는 것. 그것이 민폐끼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버스에서 누군가의 우산이 내 옷에 닿는 것이 싫기 때문에 차에 오르면 꼭 우산을 접어서 묶는다. 자리에 앉으면 창쪽으로 우산을 넣어서 남들에게 닿지 않도록 한다. 남들의 향수 냄새가 진하면 괴롭기 때문에 향수는 항상 옅게 뿌린다. 핸드폰은 차 안에서는 통화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 사무실에서도 차 안에서도 핸드폰 벨은 진동으로 맞춰져 있다.

같이 쓰는 사무실에서는 사적인 전화를 받지 않고, 수업시간에는 다른 반에 방해되지 않도록 앞 뒷 문을 닫아 둔다. 남들에게 부탁하는 일은 되도록 줄이고, 남들에게 부탁을 받으면 가능한 한 해 주려는 편이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사무실이나 차 안에서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는지 확인하고 나서 듣는다. 타이핑 소리는 크게 내지 않고, 걸어다닐 때는 발자국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다. 프린터에서 이면지가 나오면 인쇄된 면을 한쪽으로 향하게 해서 다음에 쓸 사람이 좋도록 하고, 용지가 다 되어간다 싶으면 새로 용지를 넣어둔다. 쓰레기통의 분리수거를 주의하고, 내 책상의 사물이 다른 쪽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한다.

누군가가 이런 나보고 이렇게 말했다. 같이 사는 사람들이 힘들겠다고.
누군가가 이런 나보고 이렇게도 말했다. 절대로 교감은 되지 말라고.

민폐끼치고 살지 않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되는 것일까? 글쎄.
2003/11/29 11:06 2003/11/29 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