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사세보
지난 밤에 잠시 나가사키와 사세보 사이에서 갈등을 하긴 했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이미 사세보 시간표에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은 낫토를 개봉해서 찰칵. 저렇게 겨자와 계란을 함께 섞어서 먹는데, 클리오호트에선 메추리알을 준다. 어제의 명란젓이 맛있었기 때문에 명란젓을 큰 걸 가져오고, 생선은 연어가 아니라 맛없어보여서 패스. 아침밥을 든든히 먹는 것이 여행의 철칙이다.
사세보행 고속버스는 자주 있기 때문에 지정석을 끊긴 했어도 돌아오는 티켓은 아직 끊지 않았다. 일정이 어떻게 끝날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다. 햇빛이 내리쬐는 것이 어제의 날씨가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긴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는데 꽤 덥다.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하지만, 5월 햇살에 맨살을 드러내는 건 무리다.
한참을 달린 버스가 사세보 역에 도착했다. 현대적인 쇼핑몰이 JR역에 함께 있는 건 일본에서 흔한 일이다.
실은 사세보 역은 JR 역 가운데 가장 최서단에 위치한다고 한다. 무척 도회적인 느낌이었는데 얼마 전에 새로 건축한 것이라고 한다. 재건축하면서 쇼핑몰이 같이 들어섰다고. 어쩐지 사람 냄새는 별로 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사세보 지역의 전체의 느낌이라는 것을 나중에 하루 일정을 끝내면서 알게 되었다.
미군 부대가 있는 사세보는 아무래도 군대 때문에 삭막한 느낌이 강하다는 생각을 받는다고 한다. 외국인인 나로서야 그런 느낌을 잘 모르겠지만, 바다를 끼고 있는 여러 도시들과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어쩐지, 너무나 세련되고 깔끔하지만 조금은 사람 냄새가 안난다- 라는 것이 내가 받은 사세보의 이미지였다. 버스 정류장을 찾느라 한참 걸렸다.
원래는 사세보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인 언덕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버스 정류장에서 물어보니 아쉽게도 방금 버스가 떠났고, 다음 버스는 한시간 뒤에 있었다. 사세보의 극악한 버스 배차를 나는 아직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진로를 수정, 쿠쥬쿠지마(99개의 섬?) 유람선을 타는 일정을 먼저 따르기로 했다.
요런 작은 요트를 타고 유람하는 코스도 있지만, 나는 유람선을 타는 쪽을 택했다.
펄 퀸. 이게 내가 탈 배였다. 블랙펄이 떠올랐던 건 절대 내가 죠니 뎁의 팬이어서다(…). 낮시간에 유람선이 한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데, 겨울에는 12시가 결항이다. 점심시간을 배려한 것인지. 실제 배를 타 보니 겨울에도 운치가 있을 것 같았는데.
사세보 역에 마침 '분메이도'의 지점이 있어서 냉큼 양갱을 사왔다. 나카사키의 일정을 뺄 때 가장 아쉬웠던 게 분메이도를 갈 수 없다는 거였는데 사세보 역 안에 분메이도가 있다니. 이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겠다. 자봉 양갱과 말차 양갱, 그리고 일본에서 종종 보이는 알루미늄보틀의 코카콜라. 유람선이라면 간식 정도는 있어야지.
배가 출발하고 차창 너머로 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99개의 섬이라곤 하지만 '굉장히 많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고, 실제 섬의 숫자는 세자리 수에 달한다고 한다. 무인도도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섬도 있다.
관광용인지 알 수 없는 작은 배들도 이 바다를 다니고 있었다. 아저씨의 옷차림이나 승객이 없는 걸로 보면 관광용은 아닌 것 같다.
사자섬. 이라고 한다. 사자처럼 생겼다는데. …솔직히 말하면 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in 어린왕자) 같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배는 섬과 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방송으로는 지나가는 섬들에 대한 설명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간간히 지금 지나는 곳이 해면이 낮은 곳이다, 같은 설명도 들려왔다.
앉은 자리에서 계속 바다 구경을 하는 것도 좋았지만 일어나서 갑판쪽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갑판 근처에는 선장 의상이 몇 벌 걸려 있었는데, 손님들이 자유롭게 그 옷을 입고 사진촬영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일본 관광객들이 웃으며 "캡틴같아" 등등의 대사가 들려서 조금 웃었다.
배는 서서히 바다의 가장 먼 쪽까지 도착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해변의 밑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다.
꽤 넓은 섬이다. 가까이 가서 카메라에 담고 보니 바다보다 오히려 호수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이 섬이 마지막 섬인 것은 아니다. 코스의 끝일 뿐, 99시마는 곳곳에 펼쳐져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섬에 바로 붙어있는 작은 섬에, 도리이가 서 있었다. 썰물이 되면 걸어서 건너갈 수도 있어 보였다.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있는 곳에 항상 도리이가 보인다는 것이 일본의 특성이 아닐까. 종교, 혹은 토속신앙, 무엇이라고 부르든 신도가 폭넓게 일본에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배가 다시 항구로 돌아와 내렸다. 속도가 느려서였는지 배멀미는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유람선 선착장 바로 옆에는 해산물을 사서 직접 구워먹을 수 있는 야외 식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토요일이어서였는지 손님이 꽤 있는 편이다. 돌을 넣고 철판을 올려 조개나 오징어 같은 것을 구워 먹는 듯. 간혹 아저씨들이 혼자 앉아서 구워 먹는 모습이 보여서 신기했다.
해산물도 유명하지만 사세보에서 가장 유명한 건 햄버거다. 햄버가가 어떤 지방의 대표음식이라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지만, 미군과 함께 지내는 동안 그들의 문화가 사세보의 주민들에게 영향을 준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햄버거라고 해도 일반 햄버거와는 다르다. '사세보버거'라고 인정받은 경우에 그 캐릭터를 가게에 달 수 있는데, 그런 가게들은 100% 수제 햄버거를 만든다. 주문받은 후 즉시 만들어 주는 게 기본이다.
유람선 항 근처에도 햄버거 코너가 있었지만, 일단은 패스.
유람선 매표소. 마침 사람이 없었다. 성인이 1200엔인데, 'SanQ PASS' 소지자는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바로 붙어 있는 해양박물관의 티켓을 갖고 있어도 할인을 받는다. 1200엔이면 우리 나라 돈으로 만원 정도인데, 50분간 유람하는 비용으로 비싸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토요일이어서, 부모와 같이 놀러온 아이들이 간간히 눈에 띄었다. 버스 정류장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버스가 서 있는게 멀리 보여서 서둘렀지만 놓치고 말았다. 다음 버스는 40분 뒤에 있었다. (사세보의 버스의 배차간격은 극악하다. 1시간 간격으로 있는 게 보통이다.) 바로 옆에 '사세보 버거'의 인정을 받은 가게가 있어서 들어갔다. 어차피 점심은 사세보 버거로 할 생각이었으므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사세보 버거'로 공인받은 가게에서는 '사세보 버거'들이 나타나 있는 지도를 배포하고 있다.
주문한 후 만들기 시작하기 때문에 한참 기다려서 버거가 나왔다. 패티와 함께 계란과 치즈를 넣는 것이 이 가게의 특징인 듯. 달걀은 반숙과 완숙의 중간 정도로 구워져서, 노른자가 새어 나오진 않지만 퍽퍽하지도 않았다. 패티도 꽤 좋았다. 햄버거가 이정도라면 요리로 대접받아도 괜찮겠다, 고 잠시 생각하고.
하늘이 청명하게 맑은 날이었다. 가족과 함께, 혹은 혼자서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거리가 터미널 근처에 조성되어 있는데, 주차장도 널찍해서 자신의 차로 움직이기에도 좋아 보였다. 근처에 있는 기념품 샵에 잠시 들어가 보았다. 에스닉한 물건들이 꽤 눈길을 끌었지만 가격과 효용을 생각해서 선뜻 살 수는 없었다. 어느덧 한시간이 지나 버스가 왔다. 역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버스를 탔다.
JR 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히카리' 가 눈에 들어왔다. 히카리는 사세보 버거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가게 중의 하나였다. 대기 시간이 1시간 이상이라니 사서 버스 안에서 저녁으로 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스에서 무작정 내렸다.
해상 자위대 박물관. 일본엔 군대가 없지만, 사세보의 분위기로 보면 자위대와 군대의 구별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해상자위대의 역사에 관한 박물관 입장료가 500엔 정도인가 해서 들어가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외형만으로 군대의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이 조금 오싹했다.
그리고 문제의 버거숍 히카리. 가게 안에 의자가 없는 테이크아웃점이다. 사진에 보이는 저 엄청 높은 놈이 가장 유명하다. 의외로 줄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맹점이었다.. 한시간 가량을 기다려 카운터에 도착했더니 주문이 밀려서 90분을 기다려야 햄버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버거도 마찬가지. 패티를 굽는 속도에 주문이 따라가질 못하는 것이다.
히카리 바로 옆에는 또다른 '사세보 버거' 샵인 'LOG KIT'이 있다. 히카리와 달리 안에서 먹을 수 있긴 한데 약간 고급 느낌이다. 저녁용으로 싸갈 생각이어서 패스. 사진에 록 킷이라는 카타카나 간판을 들고 있는 햄버거 얼굴의 캐릭터가 사세보 버거의 상징이다. 저 상징은 사세보 버거라는 인정을 받아야만 세울 수 있는 듯.
터덜터덜,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다음 버스까지는 40분을 기다려야 했다. 아아 극악한 사세보 버스. 히카리에서 조금 덜 기다렸다면 버스를 탈 수 있었다거나 하는 후회는 해 봤자 소용이 없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안도하고 역으로 돌아왔다. 역까지 걸어서 오는 거리가 얼마인지 알면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에 도착해서 다시 전망대가 있는 언덕으로 가고자 했으나... 아아 극악한 사세보 버스... 또 다음 버스는 75분 뒤였다. 역 바로 뒷편이 해상 공원인 '시 사이드 파크' 여서 버스가 올 때까지 가볍게 공원을 다녀오기로 맘 먹었다.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공원의 입구. 왼쪽이 '사세보' 오른쪽이 '시 사이드 파크' 라고 적혀 있다.
공원은 산책하기 좋은 길이었다. 바다와, 나무. 내가 좋아하는 조합이다. 지금 시각이 오후 한 시, 한참 일광이 내리쬐는 5월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도 잘 살펴보면 참 잘 만들어진 산책로긴 하다. 멀찌감치 뭔가 조형물이 보여서 걸어 올라가 보았다.
고래가 있는 분수대였다. 잠시 시원한 기분이 든다. 그늘이 있었다면 앉아서 쉬고 싶은 기분도 들지만, 시간도 자꾸 쫓기게 되고. 공원에서 길을 틀어 다시 역으로 올라갔다.
역 안에는 거대한 팽이가 조형물로 놓여 있었다. 사세보의 특산품이 나무팽이였던가? ;;;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아서, 아직 버스 시간까지는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갈 때 눈에 보였던 교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세보의 랜드마크 중의 하나라고 한다. 정면에서 보는 이 광경이 인상적이어서 '아름다운 건축물' 로 지정되기도 했다고 한다. 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아찔하긴 했지만, (알고 보니 뒤에는 평범한 오르막 길이어서, 보통은 뒤로 올라가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우연히 고개를 들었을 때 눈에 띈 것은 뭔가의 계시라고 생각해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아직 동복 시즌이어서 여고생들이 동복 차림으로 지나갔다. 덥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학교 지정 양말까지 있는 걸 보면 명문 학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올라오니 아담한 성당이다. 성모상도 다소곳이 서 있고. 안에 들어가서 기도를 올리고 나왔다. 불운을 탓해서는 안된다. 이 지역을 택한 것은 나였다. 이 지역을 택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름다운 성당을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도로 버스를 놓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성당의 뒤쪽은 바로 오르막길과 이어져 있어서 편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그 길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왔다. 마침 버스가 오기까지는 5분여가 남아 있었다. 조금 앉아서 땀을 식히니 버스가 도착한다. SanQ 패스 덕분에 버스는 무료다. 버스를 타고 보니 종점이 전망대였다. 맘을 편히 가지고 창밖 풍경에 시선을 돌렸다.
한시간 여를 꼬불꼬불 언덕길을 달리던 버스가 종점에 내렸다.
성수기에는 매점이 열려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자판기만이 열려 있었다. 일광이 강하다. 노출을 맞추기 힘들다 싶었더니 사진도 저렇게 나와버렸다.
전망대에서는 사세보의 시가지와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일광이 강하긴 한데도 안개가 끼어서 선명한 풍경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쉬웠다.
주변은 산책로로 되어 있는데, 산책로 양쪽에 일본시가 적힌 돌이나 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다. 일본인이라면 읽어보는 것도 즐거운 기회겠다.
전망대에 대한 설명이 여러 가지 나라의 언어로 적혀 있다.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불어(혹은 독일어나 러시아어였을지도..) 왔던 버스가 20분 후 출발했기 때문에 그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 다음 버스는 또 60여분을 더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세보와는 바이바이,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는 그대로 잠들었다. 햇빛에 익어버린 듯이 온 몸이 피곤했다. 하카다 역까지 그대로 갈 수도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텐진 버스터미널에 들어가고 있었다. 오늘이 일본에서 보내는 마지막 저녁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쇼핑 등등을 할 수 있는 기회여서 텐진에 내리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텐진 시내에는 여러 백화점이 잔뜩 모여 있는데, 그런 번화가다보니 라디오 스튜디오도 눈에 띄었다. 실제 방송도 하는 것 같다. 일본의 라디오는 우리 나라와 같지는 않겠지만. 슬슬 배가 고파왔다. 잇푸도로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했다.
잇푸도 본점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한정 라면. 아카마루와 달리 매운맛은 없다. 그래도 깊은 국물맛과 깔끔한 뒷맛은 그대로다. 반숙 달걀도 딱 내가 좋아하는 상태였다. 국물까지 깔끔히 비웠다.
후식은 니시도오리 푸딩. (그러니까 나 푸딩 좋아한다니까...)
시내에서는 박카스 비슷한 음료의 소비자 홍보가 한창. 우리 나라와 비슷하게 시음회도 하고, 퀴즈 맞추기나 경품잔치도 한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사진이 잘 안나왔지만, 하얀 모자 쓰고 있는 사람들이 스텝.
슈퍼에 들어가 푸딩 가루를 사고, 부탁받은 화장품류를 이것 저것 샀다. 그리고는 하카다역에서 첫날 사지 못한 책들을 구입. 아아 충사다. 선생님의 가방이다. (훌쩍)
내일은 아침밥을 먹고 곧바로 항구로 간다. 이렇게 짧은 여행은 끝나가고 있다.
소
켄
비
챠! (눈에 들어오는게 그거라지요(...))
저건 곡물차라 순해서 좋아. 떫지도 않고... 우리 나라에도 요즘은 비슷한 거 나오니까... 녹차들은 가끔 뒤통수맞을 정도로 독특한 맛이 나는 게 있어서 주의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