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글검색결과 [그림자의 노래] : 12

  1. 2005/05/02 그림자의 노래 두 번째
  2. 2005/04/28 그림자의 노래 첫 번째
“당연히 너와 같이 살 생각이었어. 네가 다른 사정이 있는 거라면…, 새 상대가 생겼다거나.”
“그것과는 상관없어, 원진희. 나는, 이제는 너랑은 싫다고.”

나는 일어선다. 커피향이 쓰기 때문이다. 순을 지나고 산페기로 들어가 버린 원두의 변한 향이 거슬려서다. 그래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버리는 거다.

“지윤아!”

그가 내 어깨를 붙든다. 그 손이 뜨겁다. 심장이 손에 달린 사람마냥 박동치는 열기가 내 어깨로 퍼진다. 열정이거나, 혹은 독이거나, 나는 항상 그의 손에 약했다. 저 눈빛도. 마치 나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애타게 갈구하는 눈빛에.

“싫어할 리가 없어. 너는…, 1년 전에도 늘….”

좋아했잖아. 한 번도 나를 거절한 적 없잖아. 항상 허리를 감으며 응했잖아. 달뜬 소리를 내면서.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조금 입술을 깨물었다.

“나랑, 자고 싶어?”

그의 눈을 보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섣부른 희망을 갖지 않겠다. 그의 대답은 항상 그 사항 하나에 대한 것일 뿐이어서, 해석하거나 미루어 짐작해서는 안 된다. 나는 그의 손을 내 어깨에서 치우고 익숙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씻지 않은 채로 안기는 것을 싫어하고, 그는 날 안은 후에 몸을 씻는다.

1년 동안 목욕용품의 회사가 바디샵에서 아베다로 바뀌어 있을 뿐, 물건이 놓인 위치나 가득한 프리지아 향은 그대로다. 르네휘테르의 샴푸, 아베다의 샤워젤. 세면대 옆에 놓인 로션은 예전과 똑같은 폴로. 1년이 지나지 않았으면, 그가 떠나지 않았으면,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었을까.

퀸사이즈 침대에서 그는 나를 안았다. 여름의 먼지 냄새가 머리카락 사이로 스치지만 그의 체취는 변하지 않았다. 내 가슴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젖은 손가락으로 나를 열고,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나는 소리 내지 않는다. 내 안에서 물고기처럼 꿈틀대는 그가 나를 누르고 압박해도, 나는 무표정하게 입술을 깨물 뿐이다. 내 눈이 흔들리지 않기를, 내 젖은 눈을 그에게 들키지 않기를.

“…지윤아, 왜 그래?”

급기야 그가 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도리질한다. 거친 호흡이 내 목에 닿는다. 그가, 무너진다. 뜨겁게 내 안으로 그가 퍼진다.

“…원진희, 날 사랑해?”
“…뭐?”

갑작스런 물음에 당황해서, 욕실로 들어가려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그를 보았다. 사실은 다른 것이 묻고 싶었다. 긴머리의 두 살 아래 여학생, 최나영, 너는 그 애를 안았었냐고.

“일본에서 다른 사람 안은 적 있니?”

그는 두 개의 물음에 다 대답하지 않는다.

“갑자기 왜 그래, 새삼스럽게. 그럼, 1년이나 되는 기간인데, 내가 수도라도 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너는…!”

“누구하고도 잔 적 없다면?”

“자의로?”

그의 되물음, 악의를 담지 않은 듯하지만 조소를 함뿍 머금고 있는 그 말에 돌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이것으로 상황종료. 더 이상 확인할 것도, 물어볼 것도 없다. 처음부터 선명하게 보였었다. 그걸 피한 건 내 쪽이었다.

“지윤아, 너….”
“됐어, 씻어.”

나는 자는 시늉을 하고, 시트를 뒤집어 썼다. 그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 없이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밤 여덟 시 반, 나는 열쇠를 키홀더에서 빼서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그 곳을 나왔다. 욕실의 물소리와 나카시마 미카의 노랫소리는 문소리를 감추어 줄 것이다.

거리로 나오다가 나는 슬쩍 길의 외곽으로 벗어났다.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레이스 가디건을 살짝 걸치고 또박도박 어딘가로 향하는 여자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최나영, 그가 돌아온 소식을 들었겠지. 그의 오피스텔을 알려 줄 사람은 많다. 이제 졸업반이 된 최나영은 그 열쇠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나는 그와 다시 만나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을 갈아타고 한양대 역에서 내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전철역 근처에는 소리 높여 노래하는 청년들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새내기들도 없다. 이 곳은 교통이 좋은 편이다. 이현진 선배로부터 이 곳의 방을 빌릴 수 있던 건 행운이었다. 후배들은 깐깐하다고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내가 유일하게 속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상대가 선배였다. 선배는, 지금 어머니와 함께 영국에 있다. 2년 반이라는 어머니의 파견 근무에, 선배는 좋은 기회라고 동행을 결심했다. 박사과정에 시험을 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배도 원진희처럼 갑작스럽게 떠났다.

- 지윤아, 가능하면, 나는 여기서 네가 살아줬으면 좋겠다.

선배를 도와 짐을 꾸리고 있을 때 선배는 그렇게 말했다. 고시원 방에서 점점 말라가던 내게 그 말은 구원이었지만, 그는 마치 내게 곤란한 부탁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나와 함께 침대며 옷가지를 작은 골방에 모두 쑤셔넣고, 텅 빈 책상만을 남겨 둔 방에서 그렇게.

- 싫어?
- 싫을리가요. 어차피 혼자 살고요. 그런데 집세는 어느 정도로? 저, 많이는 드릴 수 없어요.
- 집세는 무슨, 내가 오히려 관리 비용을 주고 싶을 정도인데.

무엇이든 내 것이 있었던가. 이 세상에,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이 땅에서.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20층에서 멈춰 내려오지 않는다. 나는 13층까지 걸어서 올라간다. 7층 정도에서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고, 더 이상은 갈 수 없다는 한계 상황이 될 때가 13층이다. 12평 오피스텔. 굳게 열쇠로 닫혀 있는 방을 제외하면 내가 쓸 수 있는 실제 공간은 8평 남짓이다. 그것도 내게는 과분하다. 욕실에서 새로 샤워를 한다. 그의 흔적과, 그가 사용하는 목욕용품의 향기까지도 모두 씻어내도록 몇 번이나 물을 뿌려댄다. 나도 모르게 콜록 기침을 하고 나서야 보일러를 켜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은 5월이 아니라 한여름처럼 더워도 아직 찬물 샤워는 이른 시기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커다란 타월로 둘둘 감싸고 방으로 들어와 몸을 웅크렸다.
2005/05/02 15:55 2005/05/02 15:55
그가 1년 반 만에 학교로 돌아왔다. 아직 오월인데도 날은 찌는 듯이 무더워서, 올해는 백년 만의 무더위가 될 거라고 뉴스에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여름이 오기 전에 떠났던 그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이 곳으로 돌아올 줄은.

“건강해 보이네.”

그가 내게 악수하면서 건넨 말이었다. 맙소사. 건강해 보인다고? 일년 동안 나는 계속 앓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종종 너무나 낯설어서 세수를 하고 나서도 거울을 보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1년 만에, 키가 10센티나 자란 그가 내게 ‘건강해 보이네’라고?

“여전히 커피 좋아하니? 거기서 커피를 좀 사가지고 왔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큼 앞서 걸었다. 내가 따라올 거라는 데는 일말의 의심도 없는 듯이 문을 열어서 나를 제 방 안으로 안내했다. 1년 만에 새로 장만한 그의 방에는 아직 그의 체취가 채 배지 않았다. 오래 비워둔 방의 을씨년스런 냄새 사이로 코에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1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원 진희.”
“여전히 사람을 부를 때 성을 붙이는구나, 지윤아.”

그, 원진희는 반가운 것을 만난 사람처럼 웃으면서 창가 선반에 놓여 있는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새하얀 백색 도자기 드리퍼와 투명한 유리 서버, 그가 사용하는 착색하지 않은 연갈색의 종이 필터 위로 드륵 드륵 방금 갈린 원두가 놓였다. 거기에서 사 온 원두라면 이미 순은 지나 있을 것이고, 그걸 막 갈아서 드립한다고 해도 원두의 제맛을 느끼기에는 무리다. 하지만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스텐리스 재질의 칼리타 포트가 원두 위로 부드러운 원을 그리며 물을 떨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신선한 원두의 금빛 거품도 없다. 틀렸어 원진희, 내가 마셨던 커피는 그런 게 아니야. 내가 좋아했던 건 케냐의 원두지만, 네가 볶은 채로 사 온 원두는 이미 그 맛을 잃었어. 그러니 네가 아무리 정성껏 내게 그 커피를 대접하려고 해도, 나는 흔들리지 않아. 그러니까 내 흉내는 그만해. 칼리타의 커피 도구를 가르쳐 준 것도 나, 쇼핑몰에서 전기 포트 중에 뭐가 제일 좋은지 뒤진 것도 나, 원두를 드립하는 그 자세도 바리스타들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잖아.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음악을 켰다 18평 원룸. 대학원생인 데다 다른 수입이 없는 그가 사용하기에는 사치에 가까웠지만, 그는 한 번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MD가 들어가는 CD 콤포넌트를 일본 여행길에 보고 맘에 들었다고 덥석 사올 정도로 그는 바람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거라면, 학교 장학금을 받는 교환학생의 기회 같은 것,ㅡ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양보 정도 해 주어도 좋을 텐데, 그는 제멋대로인 성격 대로 충동적으로 원서를 내고는 불쑥 떠나버렸다. 1년 전의 일이다.

“커피 마시며 듣기에 꽤 괜찮지 않아?”

나카시마 미카의 음악을 처음 들려준 건 나였다. 스산한 음색이 좋아서, 그리 잘 부른다고는 할 수 없는 노래를 어렵사리 수소문해서 중고 CD로 구하고, 소중하게 듣고 들었다.

그는, 나를 허깨비로 만든다. 모든 것이 내게서 시작되었어도 그에게 닿는 순간 그것들은 그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어울린다. 사랑하는 것이, 갈망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듯한 그는 그래서 어느 것에도 속박되지 않는 듯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향유했다.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 방금 볶은 과테말라 커피의 스모키 향은 사치이고, 힘들게 장만한 젠하이저 이너폰이나 청동 드리퍼는 내 것이 아닌 듯이 겉돈다. 할인매장에서 5년 전에 팔천원에 구입한 낡은 백팩, 몇 년이나 된 2002 월드컵 특판 티셔츠, 그런 것이 내게는 자연스럽다. 하여 대학에서의 교환학생 시험에도, 문부성 시험에도 미끄러진 후 번역 알바를 미친 듯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는 내겐, 이런 감정까지도 사치일 뿐이다.

“커피, 안 마셔?”

그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나는 설탕을 넣지 않은 짙은 커피에서 먼 나라를 꿈꾼다. 일본에 가고 싶었다. 아니, 어디든 좋았다. 집에 들어가 통곡하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된다면, 나는 무엇이든, 어디든, 사양하지 않을 거다. 쓴 커피를 들이키고 그를 본다. 귀에 들리는 건 나카시마 미카의 바람을 닮은 노래소리.

붙잡을 수 없고, 붙잡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꿈처럼 그는 거기에 있으면서도 거기 있지 않아서.

“나쁘지 않네.”

짧게 대답했다.

“그래서 지윤아, 너는 어떻게 지냈어?”

커피를 음미하듯 마시고 그는 나를 빤히 보았다. 원진희, 알아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네가 1년 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나는 놀랐지만, 너는 놀라지 않아. 기억하지도 못할테니까.

“대학원에 들어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건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예상대로라고 해야 하나. 그것 말고는 무슨 일 없었어? 너도 이제 스물 여섯이네.”

마치 자신은 스물 여섯에서 아주 멀기라도 한 듯이.

“특별한 일은 없었어. 대학원 들어가고, 번역 일을 시작하고….가끔 잡지사에서 원고 요청 오면, 교수님 글 대필하고 그러면서 살지.”

태연한듯이 대답한다.

“집은?”

그는 또 아무렇지도 않게 상처를 헤집는다. 1년 전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내가 기억하는 아픔들은 그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한양대 근처에서 자취. 지하철에서 가까우니까.”
“그래도 학교 오려면 한 시간은 걸리겠다.”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그는 일어난다. 그리고 성큼, 그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내 눈앞에 있었다. 흠칫 놀라 물러나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리지도 못하고, 3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를 보았다.

“여기서 살아. 학교도 가깝고, 집세도 안 들고.”

그 말을 프로포즈라도 되는 듯이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3년 전에, 이 집과 몹시 닮은 학교앞 16평 오피스텔, 이렇게 음악이 흘러 나왔다. 그 때는 나카시마 미카가 아닌 오니츠카 치히로였지만. 그 오피스텔에서 지금의 18평 오피스텔로 옮겼을 때도 나는 같이 있었다. 두 번째였기 때문에 나는 웃었다. 그는 의외라는 듯 자신의 팔짱을 끼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본다.

“왜 웃어? 우리, 꽤 잘 맞았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리고 너는 갑자기 가 버렸지. 떠남을 준비한 건 나였는데, 떠난 건 너였어. 더 이상 이 오피스텔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작정 짐을 꾸려 나와서는 급히 고시원 방을 구했다. 커피를 끓일 수도 없고 스피커로 음악을 들을 수도 없는 방이었다.

“...난 싫어, 이젠.”

말을 이으려다 입이 막혔다. 그의 웃음처럼 그 입술은 늘 감미롭다. 2학년 아래의 긴 머리 여자애랑 찬란히 염문을 뿌렸지. 그렇게 그 애 입술을 머금던 입술이 내 입술을 더듬으며 탐한다. 혀끝이 입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전처럼 함께 혀를 얽거나, 눈을 감거나, 양 팔로 그 어깨를 붙들거나 하지 않고. 뻣뻣하게 굳었던 혀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드럽게 풀렸지만 나는 응하지 않았다.

“지윤아.”
“싫어.”

입술이 떨어지고 처음 나온 감미로운 목소리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2005/04/28 15:54 2005/04/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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