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글검색결과 [창작/그림자의 노래] : 12

  1. 2006/05/08 그림자의 노래, 열두 번째
  2. 2006/02/11 그림자의 노래, 열한 번째
  3. 2005/11/20 그림자의 노래, 열 번째
  4. 2005/10/20 그림자의 노래, 아홉 번째
  5. 2005/09/04 그림자의 노래, 여덟 번째
  6. 2005/08/13 그림자의 노래, 일곱 번째
  7. 2005/08/02 그림자의 노래, 여섯 번째
  8. 2005/06/02 그림자의 노래, 다섯 번째
  9. 2005/05/18 그림자의 노래, 네 번째
  10. 2005/05/10 그림자의 노래 세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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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노래, 그 남자 이야기 12

갑자기 마음 한 쪽이 싸하게 아려왔다. 저 눈, 더럽혀지지 않은, 굽힘없이 빛나던 그 눈, 음악을 이야기하며 생기로 반짝이던 남자의 눈이, 변함없이 곧은 빛을 품고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을 알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입으로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지금 그 얼굴을 떠올리고 마는가.

"…저는…!"

눈과 같은 말을 하려고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젖은 눈에서 물기를 떨어낸다. 울지 않아. 원진희 때문에 울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아선 안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입술을 곱씹으며 말했다.

"이건 내 문제야. 무슨 의도로든 제 3자가 끼어드는 건 사양이야."

다정한 선배의 얼굴을 거두고 차갑게 말을 뱉았다. 가방을 바투 쥐고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떠는 그 얼굴에서 돌아섰다. 학과 사무실에 들르자, 교수님을 뵙자, 그런 일들을 중얼거리며 나는 내 등 뒤를 계속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수업에 다시 복귀해서, 의외로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텍스트는 쌓여 있었고 해야 할 과제도 몇 건인가 있었지만, 오래 자리를 비운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내게 묻는 사람도, 호기심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논문의 결과가 가장 신경쓰이게 마련인 원생들에게 동기가 수업에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교수님의 새 원고가 마무리되었을 즈음에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지윤아."

완성된 원고가 든 메모리 스틱을 받고 나서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현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거 알고 있냐?"
"…네."

뭐라 대답할 지 몰라 한참 후에야 맥없이 대답했다.

"어제, 가위에 눌렸다."

주어가 생략된 말.

"안 돼, 지윤아, 안돼, 라고."
"……."
"…그리곤 울더라. 한참 울다가…, 엄청난 얼굴을 하고는 도로 잠들었다."
"…상태는 어떤가요?"

머뭇거리다 물었다. 교수님은 한참 나를 보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나고 싶은 게 아니냐고, 불러올까 그랬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 그냥 고개만 젓고. 고등학교 때 같아. 고집스럽게 뭔가 생각하는데 말을 안해. 입을 아예 닫은 것 같이."

나는 현진선배의 고등학교 시절을 모른다. 내가 아는 선배는 늘 웃고 있었고, 내 일로 화를 내 주었고, 내 사물함 앞에 포스트잇으로 힘내라고 격려의 말을 남겨놓던 사람이다. 선배가 나를, 세상을 거부하다니. 선배가 말을 닫다니.

선배가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부디 아니길 바라는 거다 이것은. 선배가 그 때 깨어 있지 않았었다고, 선배가 깨어난 건 내게 말을 건넨 그 순간이고-, 그 전에는 어떠한 것도 선배는 몰라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 뿐이다.

"와 주지 않겠냐. 무슨 핑계를 대도 괜찮다. 이 원고라도…."

교수님이 처음으로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를 낫게 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선배가 그렇게 된 건, 밤의 차도에 다시 뛰어든 건 내가 준 열쇠고리 때문이었고-, 지금도 선배가 가위에 눌리는 건 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학과 사무실에 네 우편물이 있던데. 조교가 매번 잊어버렸다고 난처해 했다."

교수님이 말을 돌렸다. 나는 안도한다.

"또 일 생기면 연락하마. 핸드폰 꺼 놓지 마라."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자 조교가 날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김태원은 취직하면서 사직한 전 조교의 빈자리에 6월부터 온 동기생이었다. 학부가 달라서 동기라고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별로 없고, 서로 아직 존대를 쓰는 사이였다. 학부생 몇 명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가 게시판을 훑고 있고, 김태원과 같은 언어학과 출신인 이주형이 소파에 앉아서 전공 서적 몇 권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한참 있어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또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아직 내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지 못하거나.

"우편물이 온 게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을 꺼내자 그제야 아, 하고 벌떡 김태원이 일어났다.

"부피가 꽤 커서, 연락을 한다고 하고 자꾸 잊어버렸네요."

두툼한 소포뭉치였다. 발송자도, 발송 주소도 없이 굵은 글씨로 수취인란에 학교의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나서야 그 글씨가 눈에 익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류처럼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더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네가, 어째서 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피에 비해 가벼운 뭉치가 내 손에 들려서,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으로 밀어닥쳐서.

"논문 준비 시작했어요?"

이주형이 대뜸 내게 물었다.

"아니오, 아직…."

멍하니 대답했다.

"다행이다. 나도 전혀 못해서."

반말도 존대도 아닌 얼버무림으로 이주형이 웃었다.

"태원이 이 자식이 막 압박 줘서. 혼자 놀고 있는 놈 취급을 하고."
"…3학기 때 시작하면 빠듯하다고들 하니까…, 슬슬 시작해야 하긴 하죠."

나는 웃으며 김태원의 편을 들어 주고는 말을 돌렸다.

"그럼 고맙습니다, 내일 수업 때 보죠."

학과실을 나오는데 후끈한 열기가 숨을 파고든다. 여름이다.

허둥대며 지하철을 탔다. 이어폰을 꽂았다. 누군가가 날 불렀던 것 같았지만 모른척 귀를 막았다. 시이나 링고의 스산한 소리가 귀를 채웠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새로운 커피를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그러나 여전히 내 손에는 끊어지지 못한 글씨가 무겁게 낙인뒨 우편물이 있다. 땀을 흘리며 문을 열고는 털썩 대자로 누웠다. 바닥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등이 차가웠다. 거칠게 날 밀어올렸다. 병실의 차갑고 축축하던 공기 속에서 원진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당연히 그에게 안기리라 여겼을까. 더 이상은 싫다, 고 말했는데도.

가위로 소포를 끊었다. 포장 안에 든 건 쇼핑백이었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상표의 구겨진 쇼핑백 안에 잘 개어진 청바지가 들어 있었다. 내 치수였다. 너무 짙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색. 손 끝에 만져지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분명 고가품일 게다. 티셔츠 하나도 싼 것을 입지 않는 그였다. 그저 물쓰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제력을 향유했다. 그가, 내게 이 바지를 보낸 것이다. 원진희, 그가.

그는 모를 것이다. 세상에는 지하철 한 구간의 요금 때문에 오십여분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홈플러스의 이월 상품 할인에 맞춰 판매하는 칠천원짜리 운동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멋부리는 것과 다른 이유로 머리를 기르는 사람, 대학 교재를 산 달에는 학관 식당 국수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시디 한 장에 손이 떨리고 계절이 바뀌면 지난 해의 옷이 아직 맞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온 몸에서 닭살이 도도독 돋았다. 이가 부딪히도록,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도록 계속 계속 찬 물줄기를 맞으며 그냥 나는 그렇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도록,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원진희가 했던 그 눈빛을, 놀라고 상처입은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2006/05/08 10:35 2006/05/08 10:35
그 남자 이야기, 10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다 보니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저편에 새하얀 플라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를 집어들다가 으슬 오한이 스친다. 무서웠구나. 뒤늦게 내 감정을 확인하고 하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 욕실로 들어가 아래를 씻고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새로 입었다. 원진희가 보였던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거칠던 손끝의 열기, 아직도 입술에 떠도는 뜨거움.

선배의 옆에 앉았다. 잠든 듯이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 선배를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선배.”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길고 가느다란 선배의 손가락을 감쌌다.

“다시 보지 않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서워서… 무서워서…, 이런 제가….”

띄엄띄엄 서툴게 말이 새어나간다.

“……지윤…아?”

귀를 의심했다. 손끝에서 선배의 손가락이 푸득, 떨었다.

“선배?”
“…너, 왜……, 여기… 있어.”

의문문인지, 아니면 그냥 맺음말로 한 건지. 급하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당직의가 올 것이다. 선배는 눈꺼풀을 무겁고 힘겹게 파들거리다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나를 찾아 시선을 돌리기에 내가 그 끝으로 고개를 가져갔다. 검은 눈이 서서히 초점을 맞출 즈음에 당직의가 도착했다.

나는, 병실에서 쫓겨났다.

귓속에서 차게 앤 아스카가 들렸다. Say Yes, Say Yes.

학교에서 교수님이 달려왔다. 의식만 찾으면 골절이 아무는 것을 기다리는 것만 하면 된다고 그랬다. 검사실로 간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 병실 복도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에 교수님이 선배가 탄 휠체어를 밀고 돌아와 나를 보았다. 퀭하니 핼쓱한 선배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수고했다. 이제 집에 돌아가. 계속 애썼다.”

교수님이 이야기했다. 선배는 나를 스치듯이, 그대로 통과하듯이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빌려준 노트북과 CDP와 음반을 챙기는 동안 나는 완전히 그 공간의 타인이었다. 선배에게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병원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택시를 탈 돈은 없다. 가방끈을 단단히 조이고 나는 걸었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도 없다. 도시는 메마른 형광색의 불빛만을 뱉아낼 뿐, 차가 지나가는 소음과 바람소리만이 공기에 가득 차 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버스 노선을 따라 걸었다.

새벽 공기에 뿌옇게 시선이 밝아졌을 즈음 다리는 나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뻐근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오래 비워둔 집에서는 먼지 냄새가 난다. 버석거리는 이부자리가 부담스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줄기가 다리에 닿으니 오한이 또 일어난다. 벽에 기댔다. 습기 어린 창 너머 뿌연 풍경을 보면서 나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선배의 눈빛, 선배의 태도, …그리고 원진희.

갑자기 저물어 버린 더위처럼 시간은 뻥 뚤려버린 듯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음악이 필요해. 차게 엔 아스카? 아니. 오니츠카 치히로? 아니. 나카시마 미카, 아니, 오페라의 유령, 아니 아니. 무엇이 내 것이었고 무엇이 외부였는지 경계가 허물어져 무너지고 내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조차도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하루를 꼬박 방 안에 웅크려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수많은 꿈이 떠돌았다가 사라졌다. 깨어났을 때는 선배가 다시는 나를 보지 않으려 할 지도 모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넋나간 사람처럼 수업에 다시 나갔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번역을 했다. 아무런 가사도 없는, 칸노 요코의 연주곡들이나 혹은 아주 오래 듣지 않았던 바하의 첼로곡들을 CDP에 넣고 다녔다. 세상과 단절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침묵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땅을 보고 걷는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드물다. 누구나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한다. 조명의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날 보았더라도 쉽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등 뒤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조명과 모노 드라마의 일이 생각난 건 번역의 원고를 교수님께 넘기고 난 다음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하고 있을까, 성실하고 고지식해 보이던 1학년 박현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연까지는 좀 더 넓은 조명의 동아리방을 같이 쓰게 될 거라고 말했던 기억을 더듬어 조명의 문을 두드렸다.

“어 오랜만이다, 지윤이 아냐.”

뭔가 정리중이던 동기가 반갑게 인사했다. 후배들이 꾸벅꾸벅 인사해 오는 것 사이사이로 낮게 내 이름을 귀뜸해주는 소리들도 들린다.

“너 못 본 사이에 더 마른 거 아니냐?” 동기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겠지만.

“딱히 체중관리를 하는 건 아닌데.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아닌걸 뭐. 공연 준비는 잘 돼 가지?”

웃는 얼굴로 물으니 긴장되었던 공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저…, BG 선정한 건데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박현규의 얼굴에 조금은 대학생 티가 배어 있었다. 옅은 담배 냄새가 번진다. 전에는 피지 않는 것 같더니.

“그럼 밖에서 둘이 좀 이야기 해 볼께.”
“그래 그래, 그 녀석 원진희도 갑자기 안 나와서 혼자서 낑낑댔어. 엉망진창이면 막 혼내 줘라.”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서늘해지는 머리를 들킬까봐 급히 동아리방을 나왔다.

대본을 읽는 속도는 빠른 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제대로 읽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각본 녀석도 있었던가. 훑으면서 지나가는 곡명들이 다양하다. 현대적인 분위기에 맞춰진 느낌이었다. 클래식 곡명이 들어와서 보면 뉴에이지 풍의 편곡자 이름이 뒤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뮤지컬 곡이 몇 곡. 감정의 흐름에 꽤 잘 맞춰져 있는 솜씨가 초보자 같지 않다.

“전체적으로 잘 되어 있네.”

녀석이 환히 웃는다.

“그런데 이거, 이건 좀 더 생각해 볼래? 지킬 앤 하이드, 너무 떴잖아. 앵콜 공연에다, 암표까지 돌아서 연극 팬들은 거의 다 최근에 봤을 텐데. 이 곡은 원작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아.”

짧은 대답에 또 얼핏 담배 내음이 풍긴다.

“뮤지컬 곡 쓰는 게 사건별로 어울리는 곡 찾기도 쉽고 그렇긴 한데, 유명한 건 조심하는 게 나아. 연극이 한창인데 아 이거,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이 생기거나 할 수 있거든. 창작곡을 쓸 수 있으면 제일 좋지만 여건이 안 되니.”

“예에,” 주억이는 녀석을 보다가 불현듯 물었다.

“담배 펴?”
“예? 아, 예…, 어, 얼마 전부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면 끊지 그래? 몸에도 안 좋은 걸 뭐하러 일부러 배워.”

무심히 말했다. 녀석이 벌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그만 웃어버린다.

“나한테 죄송할 일이야? 뭐, 그냥 하는 소리야. 하루에 한 갑이면 열흘이면 얼마야? 그 돈이면 CD 한 장을 사겠다, 그게 내 생각이어서. 기호식품인데 누가 뭐라고 할 성질이겠어 그게.”

설명하다보니 구차한 기분이다. 내가 이 녀석을 야단칠 이유가 또 뭐가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 위치도 아닌데다가.

“그런 기분으로 다시 한 번 짜 봐. 어지간하면 분위기는 하나로 통일하는 게 좋은데, 그건 지금도 잘 돼 있네. 강렬하게 강조되는 캐릭터의 상징 음악을 넣어 보는 것도 좋고. 지금도 처음 한 것치곤 잘 돼 있으니까 편한 마음으로.”

끄덕거리는 녀석의 얼굴이 진지하다. 아 그래,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어. 누군가가 열중한 얼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몰두해 있는 얼굴. 내가 그래서 이 녀석을 만나고 싶었던 거구나.

“지윤 선배.”

그림자가 느껴진다 싶더니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최나영. 언제나 밝은 빛을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원진희의 그녀. 나는 태연하려 애쓰면서 그 얼굴을 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이라고 물었던 것 같다. 박현규가 난처하게 일어나 자리를 피해주고 나자 최나영은 확연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동거했던 거에요? 진희 선배랑.”

물음이 아니다, 추궁이다.

“내가 원진희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거 이제 알았어?”

의미를 알면서도 모른 척, 부질없이 화두를 돌려 보려 애쓴다. 소용없을 게 당연한데도.

“깨끗한 척 순수한 척 혼자 다 하더니, 그랬던 거예요? 그러면서 진희 선배가 일본 가니까 재빨리 딴 사람에게 붙은 거네요? 그래놓고 또….”

“현진 선배는 관계 없어.”

말을 잘랐다. 선배는 안된다. 선배는 내개 얽혀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원진희와의 일은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고 내 책임이었지만 현진선배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더러워.”

최나영이 짧게 내뱉었다. 붉은 눈이다. 거꾸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갑작스레 겹쳐지는 환영. 그가 병실에서 내게 했던 것,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마자 욕심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오던 일…, 그리고 그는 최나영을 아마도 그렇게 안았을 터다. 목마르게, 욕심스럽게, 뜨거운 눈으로 최나영의 몸을, 얼굴을, 눈을 핥았을 터다. 오직 그 때만 보여주는, 간절한 눈빛을 했을 터다.

“뭐가?”

차갑게 말이 새어나왔다. 손이 빳빳하게 굳는다.

“너랑 원진희랑 사귀는 거 학교가 다 알거든. 그건 깨끗하고? 네 연애는 아름답고 청결하고, 나는 더러워?”
“틀려요! 나랑 선배랑은…! 어디다 비교하는 거예요!”
“웃기지 마. 나 너한테 무슨 소리 들을 정도로 죄 지은 거 없어. 더러워? 거울이나 보지 그래?”

짧게 말을 자르는데 화끈 뺨이 달아 올랐다. 최나영의 붉은 눈에서 투둑 물기가 흘러 내린다.

“선배가…, 왜 이딴 사람을…!”

돌아섰다. 최나영이 팔을 잡았다. 뿌리치고 노려본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본다. 원진희의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지만 결코 좋아할 수도 없는 그 여자를 본다.

“진희 선배 어디 있어요? 알고 있죠?”
“원진희 못 본지 한 참 됐어.”

재차 돌아선다.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보았겠지. 수근대겠지. 동거라고? 그랬던 거야? 소문이 소문을 낳을 게다. 아아, 다 상관없다. 아무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매었다. 오지 말 걸. 그냥 평소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집에서 무엇을 하면 좋은가. 알고 있었다. 원고를 넘겨 버린 지금 텅 빈 집이 내게 어떨지, 선배의 소식이 오지 않을까 끙끙대면서 있는게 두려워서 나는 여기 오지 않았나.

“…선배….”

등 뒤에 들리는 목소리에 멈추어 섰다.

“괜찮…으세요?”

머뭇거리는 목소리. 현진 선배가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만들지 않을 테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 같은 건, 나를 지탱하는 타인 같은 건 바라지도 만들지도 않을 테다. 그러는 순간, 불쑥 눈 앞을 덩치 큰 그림자가 막아선다.

“정말…이에요? 그…, 원진희 선배…와.”
“…충분히 추궁 당했으니까 너까지 이러지 말아줄래.”

너는 타인이니까. 아직 너는 내 인생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나쁜 사람 이었군요….”

응, 그래. 네 눈에 어떻게 내가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불러도 돼.

“…그러고 저 여…선배한테 가 버리고…, 원진희 선배…나쁜 사람이네요.”

띄엄띄엄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놀라 박현규를 보았다.

“…울지 마세요, 지윤 선배…. 그런 사람 때문에… 울지 마세요.”
2006/02/11 14:51 2006/02/11 14:51
그 남자 이야기, 8
그 남자 이야기, 9


병실에 노트북 사용이 되는지를 알아본 후에 교수님은 내게 노트북을 빌려 주셨다. 다른 교수님께 사정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고 간단히 이야기를 전했다. 원고의 마감은 연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거의 병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의식이 없는 동안 주사제만으로 영양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배를 채우러 밖을 나오긴 했지만.

마치 시간이 완전히 멈추어 버린 듯이, 병실 안은 그대로 가을을 향해 접어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공용의 세면장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면 선배는 그저 잠든 듯 계속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언제 의식을 차릴지도 알 수 없었다. 회진을 온 담당의사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고 했지만 나는 종종 선배가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거라는 선고를 받는 악몽에 시달렸다. 잊어버리려는 듯이 번역에 몰두하다가 결국 집에 들러 시디를 몇 장 챙겨 왔다. 정적이 흐르는 1인실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롭게 아름다워서, 음악조차 없으면 나는 그 병실의 안으로 녹아들어가 함께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교수님은 2-3일에 한 번 병실에 들렀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배의 집, 영국과 한국 어느 쪽에도 선배의 사고 소식이 들어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병실에는 교수님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교수님은 항상 조용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 돌아갔다.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돌연 교수님이 물었다. 나는 교수님과 선배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타이핑을 하고 있다가 에, 하고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랄 것도 없는 짧은 탄성이었다.

“사귀는 사람 없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회진은 보통 몇 시에 오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너 알게 된지도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내가 학생들 개인적인 일은 잘 모르는 편이라.”

어느 교수님이든 그건 마찬가지였다.

“원진희인가 하는 녀석처럼 화려하게 소문을 뿌리고 다니면야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지만. 너랑 동기였던가. 너 학교 안에서 딱히 누구랑 친한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교수님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젊은 나이에 지금의 위치에 오른다는 건 운만으로도 실력만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평온한 표정이어도 지금의 눈은 묘하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무엇을 지금 내게서 살피고 있을까, 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

“너랑 현진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네.”

순순히 대답했다. 사귀는 사이였다면 오히려 선뜻 그 집에서 살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가 영국을 간다고 했을 때, 이미 나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명백한 것은 그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두 사람의 출국, 어느 쪽이 나를 뒤흔들었나. 이 무심한 교수님조차 알 만큼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던 그 녀석. 지금도 그 이름만으로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조카가 이 녀석 뿐인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이 녀석이 날 따르더라고. 왜 그런지는 모르지. 교수가 되고 싶어 하나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아니고. 이 녀석 머리는 좋아도 묘하게 차가운 데가 있어서, 사람 상대하는 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차갑…지 않았어요.”

“이 녀석 살갑잖기로 유명한데? 고등학교 때는 더해서, 자기 가르치던 담임이 해고됐는데, 애들 다 운동장에 꿇어앉아 단식하는데 혼자 집에 온 녀석이야.”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선배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동기 하나가, 경멸을 담아 들려주었던 이야기. 나는 금방 잊어버렸다.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실제에다 감정이 더해져서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그런 점이 나는 맘에 드는 거지만. 그래도… 또 다정하기도 한 녀석이니까.”

나는 진심으로 예, 하고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분할 만큼 받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선배는 내게 주었다.

“…젊은 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교수님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너는, 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남자 같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호하다.

“애매한 위치에 있지 마, 많은 사람이 피곤해 진다. 한 사람만의 일이라는 건 원래 없어.”

교수님은 선배의 환자복을 조금 쓰다듬었다.

“아는 친구 하나가, 미혼모인데.”

나는 담담히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좋아했던 게 하필, 유부남인데다, 언니의 남편이라. 그러곤 겁이 없달지, 애까지 낳았지. 그런데 그게 어디 혼자만의 문제가 되나. 그 사람 가정을 깰 생각이 있건 없건, 관계된 사람이 이미 숱한데. 혼자 잘 정리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게 되겠어.”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의 아이를 낳는 일이, 그렇게 항상 일어날 정도로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 사람, 그렇게 술을 마시고. 그러기에 그 사람, 늘 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친구분은, 그럼…?”

“언니라는 사람이 착해 빠져서, 그 아이를 자기 애 삼아서 키웠어. 친구는 그 뒤로도 다른 남자 못 만나고 계속 혼자 살지. 지 자식인데 자식이라는 소리도 못하고. 그게 자기가 책임지는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뭐야. 벌써 몇 사람이나 상처 입히고. 제 한 몸은 편해 졌는지 몰라도.”

나는 교수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교수님의 눈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각도에서는 더더욱 없었다. 아아, 이 사람이 이런 눈을 하고 있었구나. 이런 눈으로 현진 선배를 보는 거구나. 가슴 한쪽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번져나갔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포근한 감각이었다.

“아마… 편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단정하게 묶은 교수님의 머리카락과, 곧은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까이에서 그냥 보고 있는 것, 힘드셨을 거예요. 아예 다른 곳으로 간 것보다 나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한 몸 편한 일은 아닐 것 같아요.”
“…….”

쿡, 교수님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학부생들이 무섭다고 말하는 그 웃음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볼수록, 여성스럽구나.”

교수님의 말 뜻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쁜 의미로 듣지 말고. 좋은 뜻이야. 그게 천부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통 안 되던데.”
“자주 듣는 말인걸요.”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오늘은 다른 후배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과는 다르게, 아프다.

“그럼 나 이만 돌아갈게. 잘 부탁한다.”

교수님이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나는 교수님이 쓰다듬었던 선배의 환자복을 조금 매만졌다.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는 깨어나야만 했다. 아직 선배에겐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내 기준이 아니라 선배의 기준을 듣고 싶었다. 선배는 원래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가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선배가 내게 맞춰왔을 많은 것들이 원래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CDP를 켰다. 이런 날엔 나카시마의 ‘Music’ 음반이 제격이다. 케이스에 꽂혀 있는 시디를 빼서 플레이어에 넣었다. 잠시 첫 곡이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플레이어가 멈추었다. 액정도 꺼졌다. 충전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노트북의 외장 시디롬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받지 못했다. 충전기에 배터리를 넣는다. 오랫동안 나와 같이 한 CDP, 주머니 모서리가 조금 닳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게다. 이 낯선 도시에 올라온 지도.

시디 지갑에서 시디들을 꺼내서 정리했다. 충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차게 엔 아스카의 베스트 앨범. 선배가 눈을 뜨면 틀어 주리라 생각해서 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하철 1호선과, 오니츠카 치히로와,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 브로드웨이 공연의 녹음판이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듯이 화득 놀라 급히 도로 시디 지갑에 챙겨 넣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을까.

그래,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무심히 CDP를 켰을 때 낯선 음악이 나와서 놀랐던 적. 원진희는 나에게 미리 말하지도 않고 CDP 안의 시디를 바꾸어 놓고는 했었다. 참으로 원진희 다운 선택이곤 했었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는, 일본으로 가 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호의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듣던 음악을 나도 듣게 하려는 것. 내가 좋아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녹아내 버리는 원진희가 내게, 자신만의 것을 주고 있는 거라고. …그러고 보면,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나. 그러고 보면, 이제 만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입 밖에 낸 적이 있었나. 혹시라도 원진희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세수를 하려고 병실을 나왔다. 금방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세수를 하려고 얼굴에 물을 갖다 댔을 때, 뭔가 뜨뜻한 것이 흘러 내렸다. 붉은 방울이 점점이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피. 선배는 얼마나 피를 흘렸을까. 그에 비하면, 검은 아스팔트에 뜨겁게 번졌을 선배의 선혈을 생각하면, 이런 것이야.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한참 보고 있는데, 들어오던 간호사가 깜짝 놀란다. 무슨 말을 하면서 나를 끄는지 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뭔가 처치를 하고, 걱정스럽게 뭔가 말을 하고, 그 모든 것이 남의 일인 듯이. 한 시간 가량을 붙들고 있더니 가제도 도로 떼어 내고 가도 좋다고 한다. 그 말만이 겨우 들려서 슥슥 추슬러 병실로 돌아온다.

문을 열었다.
원진희가, 있었다. 나는 뭔가 말했다. 무어라 말하나, 내 목소리가 무슨 말을 만드나.

“궁금해서.”

평소같지 않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아, 소리다. 처음으로 선명하게 생명을 갖고 소리가 귀 안으로 들어온다. 차가운 손이 내 뺨을 만졌다. 흠칫 물러나서, 그를 보았다. 굳은 얼굴. 어째서. 어째서 그런 눈으로, 알 리 없는 이 곳에 그가 있는가.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쥐었다.

그가 저런 눈으로 날 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단 한번도 그는, 저런 눈으로 날 보지 않았다.

화내고 있는 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이나영이 재회 이후 다시 공식 커플처럼 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나는, 그런 거라고?

따뜻하게 귓불에 키스한다. 차가운 손이 어깨를 쥐고 있더니, 그는 내 얼굴을 음미하듯이, 어루만지듯이 키스하고 내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쓰다듬는다. 조심스럽게 그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는다.

“원진희!”

그가, 가슴을 더듬으며 나를 감쌌다. 그를 밀어낸다. 아니, 안 돼. 이제 더 이상은 싫다고. 더 이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나는…, 나는….

그는 물러나는 대신 허리띠 버클을 끌렀다. 소스라치게 놀라 뿌리친다. 철썩, 그의 뺨이 붉었다. 아아, 때리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물러났다. 돌아가, 돌아가. 제발, 나를 무너지게 하지 마. 너에게 더 이상 나를 휘말리게 하지 마.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옷을 끌어올리고, 끌어내렸다. 서늘하다. 병실은 춥지 않은 온도인데도, 살갗에 닿는 그의 손가락이 차갑다. 몇 번이고 밀어내고 버둥거려도 그가 나보다 힘이 세다. 그가 젖은 입술로 내 가슴에 입맞추고, 내 다리를 적셨다. 뚜욱, 하고, 다른 것이 떨어졌다.

그가, 울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이 열중해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이렇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데. 어째서.

그는 한참만에 몸을 떼었다.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다시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다. 다만 그 붉은 눈을 하고 일어나서,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병실 문이 닫혔다. 벽에 등을 기댔다. 드러난 등으로 차가운 병실 벽이 닿는다.

그렇게 차가운 손을 하고서, 그렇게 아픈 눈을 하고서, 날 보고 어쩌라는 거야.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줘.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는 ....

응, 원진희. 날, 사랑해?
2005/11/20 16:15 2005/11/20 16:15

그 남자 이야기, 7

“지윤아.”

선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선배도 결혼을 하고 떠나간다. 내 곁에 남아 있지 않는다. 선배가…

“나랑, 같이 살래?”

손을 내밀었다. 선배의 말은 원진희의 것과는 다르다. 선배는 원진희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대한 것에 화내 준 사람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 말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러니까 선배의 지금 이 말은, 내가 오해했던 그 때의 표현이었다. 원진희가 내게 했던 말. ‘여기서 살아’,에서 내가 떠올렸던 그 벅찬 기대감.

…하지만.
네, 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역시… 안 되겠지?”

웃으며 선배가 말을 돌렸다.

“…죄송해요 선배.”

선배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선배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흩어 놓는다. 가늘고 긴 선배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선배는 웃고 있다. 젖은 눈으로 웃고 있다.

“줄곧 널 좋아했어.”
“…선…,”
“그냥 듣고 있어 줄래?”

말을 멈추었다. 선배는 여전히 웃고 있다.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어. 2학년 때, 듣기 싫어서 미적거리다가 1학년들 잔뜩 있는 곳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널 봤지. 눈 한번 교수님한테서 떼지도 않고 열심히 필기를 하는 얼굴이 눈에 익었어. 우리 과 애다 싶었지. 그러더니…, 수업이 마치니까 곧장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나가더라. 단정하게 백팩을 양쪽 어깨에 메고는,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전공교실로 가더라.”

선배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까 원진희랑 같이 산대. 지방에서 올라와서, 부잣집 도련님이 방 한 칸을 내어 준 거라고들 했지. 나는 그 녀석이 싫었어. 네가…, 결석하거나 늦게 지친 얼굴로 오는 날이면, 항상 그 녀석은 평소보다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 네가 말하기 전에 반쯤은 짐작하고 있었어.”

선배는 나와 닮은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돌리면 거의 선배가 있었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선배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깐깐하다고들 해도 나에게만큼은 자상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선배를 오해한다고 생각했다. 선배가 내가 듣는 가수를 알고 여행길에 내게 시디를 선물했을 때에도, 유독 닮은꼴인 내가 생각났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원진희를 탓할 자격은 없다. 선배는, 그 오랜 시간동안을 날 보고 있었다는 거다. 영국으로 가면서도 이 집을 내게 빌려준 건, 선배 나름의 사슬 아니었을까. 나는 왜 그걸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좋은 선배로 따라 주어서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 마음은 그대로고. 그러니까 부담스러워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선배는 웃고 있다.

“그래도 명확하게 해 놓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고 생각해서 말한 거니까. 만약 부담스럽다면 잊어버려 주면 좋겠고.”

“…선배 저….”
“자, 이걸로 끝.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선배는 일어나서 자기 접시를 씻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천천히 정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흡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접시에 놓인 만두를 먹었다. 만두는 따뜻했다. 이 더운 날씨에 입 안에 들어가는 만두는 뜨겁지 않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입 안에서 만두 속이 부드럽게 씹혔다. 나는 남김없이 만두를 먹고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선배 방 손잡이를 잡아 보았다. 묵직하게 잠긴 것이 느껴졌다. 똑 똑 두 번 노크를 해 보았지만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척이다가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선배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이 아침마다 선배가 나간 뒤에 일어나곤 했지만, 오늘은 겨우 5시였다. 작은방 문을 열어 보았더니 스르륵 열렸다.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이불이 개어져 올려진 건 언제나의 아침과 같았지만 오늘은, 선배가 들고 온 노트북도 선배의 수트케이스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선배가 오면서 가지고 온 물건이 모두 사라져 있는 것이다.

…돌아갔구나.

한국에는 선배 아버지의 집도 있었다. 선배는 거기로 갔을까. 아닐 것이다. 선배는 평소에도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입을 열어 들려주는 가족의 이야기는 주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선배가 혹시 돌아올지 몰라서 이불을 도로 내려놓았다.

선배가 만들어 놓은 스크램블 에그가 없는 아침이었다. 토스트에 버터만 발라서 한 쪽을 먹고 앉았다. 이걸로 끝, 이라니,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니. 선배도 그게 불가능한 걸 알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면 선배는 이렇게 떠나지 않아도 되는데. 냉장고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지도 않고 이렇게 가 버리다니.

갑자기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내가 이 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선배가 영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이 집을 관리하는 게 선배가 내게 부탁한 거였다. 그럼 선배는 처음 계획대로 돌아오는 걸까. 아니면 영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잡는 걸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왔다. 나는 여전히 백 팩을 양쪽 어깨에 맨다. 가방이 무거운 것도 있지만, 한쪽 어깨로 매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냐고 놀리던 동기들도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되어 버렸다. 그걸 좋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내 뒷모습을 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애정과는 다른 무언가, 마음을 받는 것이 아무리 기쁘더라도- 그 답을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거였겠지, 원진희도. 설사 내가 줄곧 보고 있다는 걸,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도, 그게 기뻤더라도, 응해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가슴이 지끈 아렸다. 문을 잠그고 건물을 나왔다.



학교에 와서 들르는 곳은 항상 교수님의 방 정도였다. 수업이 있는 시간에 거의 맞추어 강의실로 가고 나머지 시간은 교수님 연구실에 딸려 있는 방에서 머물렀다. 원래는 교수님 방을 통해서도 갈 수 있고 복도 쪽의 문을 통해서도 갈 수 있지만 대개는 캐비넷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두 방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문을 한쪽으로 해 두는 편이 보안상 좋다는 이유였다.

조명에서 원진희를 만난 이후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수동에서 보냈다. 교수님은 집중할 때에는 주변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셨다. 다른 방에서 나는 조교에게 지급되는 컴퓨터로 메모리 스틱을 꽂아 번역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 방에서 옆방으로 가는 문은 닫아 두고 있어서 혹시라도 손님이 들어오더라도 내가 작업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킬 염려는 없었다. 옆방에 있었지만 교수님과는 별로 이야기할 일도 없었다. 수업이 있을 때만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교수님은 내가 갑자기 조교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에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보통 여덟시 반 정도에 교수님은 출근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아홉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교수님은 오지 않았다. 오늘은 1교시가 없는 날이긴 했지만 교수님은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하시곤 했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슬슬 들기 시작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한지윤입니다,”
“내 방이냐?”

수화기 너머에서 교수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교수님 오늘 2교시 수업 있으신데요….”
“알아, 과 조교한테 연락해서 오늘 결강이란 이야기 좀 해 줘. 지금 병원인데, 일찍 들어가도 4교시나 되어야 갈 것 같다.”

병원, 이라는 말에 갑자기 심장이 쿵쾅, 소리 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도 여기로 좀 와 주면 좋겠다. 연대 세브란스 응급실인데, 곧 외과병동으로 옮길 거야. 외과병동에서 현진이 이름 대고 들어와.”
“…현진선배요?”
“그래. 현진이 지금 여기 있어. 새벽에 교통사고 나서. 학과 일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와라.”

교수님은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가 마는 듯이 전화를 뚝, 끊었다.

넋이 나간 듯이 영문과 학과실에 가서 교수님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는 정신없이 택시에 탔다. 세브란스 병원은 신촌 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택시에 오르고 나서야 방에 원고를 그대로 펴놓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되돌아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하루 그 방은 잠긴 채일 테니까.

일반외과 병동에서 현진선배의 이름을 댔을 때, 막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은 집에서 입는 옷차림 그대로인 듯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는 손짓했다. 1인실의 새하얀 병실에 선배가 누워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한 쪽 다리와 한 쪽 손에 깁스를 한 채로 퉁퉁 부은 얼굴이 선배라는 걸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트케이스 들고 새벽에 횡단보도를 건넜단다. 목격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파란불에서 다 건넜는데 뭔가 주우러 다시 횡단보도로 돌아갔다더라. 깜빡거릴 때 지나가던 트럭에 받혔어.”

교수님은 나에게 전화했을 때보다는 훨씬 진정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을 만큼 선배는 만신창이였다. 옆에 놓여 있는 수트케이스도 찌그러지고 긁혀서 원래 내가 알던 그 물건 같지 않았다. 꼼꼼하고 철저한 선배가 도로 횡단보도로 돌아갔다니. 달려오고 있는 차도 보지 못했었다니.

“손에 저거 쥐고 있었어. 뼈 나간 거 맞추고 하느라 빼냈는데 놓지 않으려고 해서 애먹었대더라.”

교수님이 탁자 위를 가리켰다. 은으로 만든 열쇠고리. L.H.J.

“그래서 널 불렀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선배가 이야기했을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저 열쇠고리를 누가 주었는지. 선배의 출국일에 맞춰서 급히 들고 갔던 열쇠 고리 끝에는 처음 그게 주인을 찾아 갈 때처럼 오피스텔의 열쇠가 꽂혀 있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저런 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다시 돌아와서.

“지갑에 내 명함이 들어 있어서 병원에서 나한테 연락했다. 저 녀석, 그 흔한 핸드폰도 없지 않냐. 다른 친척들 들으면 까무러칠 일이라 친척들에게는 연락 안했고. 이 녀석 지 애비 만나고 싶어할 것 같지도 않았고.”

교수님이 담담히 말했다.

“현진이 곁에 좀 있어주지 않겠냐.”
“교수님 저는….”

뭔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선배와 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피붙이보다도 더 믿었던 사람이었다. 내게는 식구들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교수님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 지금 나는 선배 곁에 있고 싶었다. 선배가 깨어났을 때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제가, 있을 게요.”

2005/10/20 16:12 2005/10/20 16:12
그 남자 이야기, 6

며칠간 선배는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오랜만의 귀국이니 만날 사람도 많을 테고, 친지들과도 일이 있을 거다. 하지만 혹시나 선배가 일찍 들어오지 않을까 해서 만들어 둔 저녁밥을 다음 날 아침에 그대로 보게 되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곤 했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선배가 매일 아침 챙겨 놓는 아침이었다. 선배는 내가 일찍 일어난 날에도 항상 먼저 나가고 없었다. 더운 여름에 부드러운 스크램블은 좀 식어 있어도 상관없었지만, 냉장고에 바꾸어 붙여두는 메모에는 한 번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즈음에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날 밤에 내가 선배를 상처 입힌 게 아니었을까. 내가 의식하지 못한 무언가로 선배가 화가 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내가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리 지르며 내 목을 조르던 그 남자 외에도 내가 지금껏 사는 동안에 나를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이 없었던가. 처음 그 남자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 날의 ‘그 여자’, 그리고 등 뒤에 서 있었던 ‘그 애’ 지훈이, 술이 취해 붉은 눈으로 내 몸을 훑는 그 사람, 그들의 눈에 종종 덜함 없는 살의가 맺히곤 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잊지 못한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꼬박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 은색 메모리 스틱. 내 하드디스크에는 이 글의 자료가 남아 있어서는 안된다. 나는 항상 이 스틱에만 작업을 했다. 음악을 크게 틀었다. 나카시마 미카도 오니츠카 치히로도 아닌, 생뚱맞게도 차게 & 아스카를 종일 틀어 놓았다. 가끔 안전지대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음반을 오랜만에 꺼내 틀기도 했다.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무던한 목소리들이 그대로 귓전을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로 견딜 수 없어지면, 미샤 마이스키를 걸었다.

원진희와 함께 조수미 콘서트를 보러 갔었다. 재능으로 뭉친 여인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나는 울었다. 앵콜무대의 재기발랄함에도 웃지 못했다. 내가 앉은 좌석은, 내가 교수님께 매월 받는 돈의 1/2, 반 달 치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는 내게 귀찮은 것이라도 되는 듯 티켓을 내밀고는, 나란히 앉아서 공연 내내 조금도 변함없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너무 평범한 선곡이야.

원진희가 짧게 중얼거렸다. 대중적이라고, 누구나 알 만한 알려진 곡에, ‘명태’까지 포함된 선곡이 그는 싫었던 모양이다. 사인을 받으려 줄선 이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집으로 돌아와 몇 년 전에 발매된 조수미의 음반을 시디 플레이어에 걸었다. 그 때 나는 부끄러웠던 것 같다. 처음 앉아 보는 클래식 공연장의 최고 좌석에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해했던 내 맘을 원진희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했다.

미샤는, 원진희가 없던 겨울에 만났다. 몹시 앓았던 십이월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콘서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곱슬머리의 남자의 웃음 띈 얼굴에 홀린 듯 버스를 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가서, 30분남은 공연의 현장티켓을 구입해 들어갔다. 스웨터에 청바지, 백 팩 차림.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들어간 공연장 구석자리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미샤를 보았다. 긴 곱슬머리, 그는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열에 들뜬 몸으로 나는 처음 본 미샤에게 반했고, 두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카드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였다. 그 날, 텅 빈 오피스텔에서 열로 앓으면서 나는 애꿎게도 더위에 지친 나를 식혀주던 원진희를 생각했다. 안긴 후 지쳐 늘어진 나를 안고 욕실에 들어가 찬 물을 틀어 주던 원진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떠난 날 아침 짐을 꾸려 오피스텔을 나왔던 것을, 그가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던 것을 곱씹었다.

십이월의 한가운데, 크리스마스를 10일 앞둔 그 날에 앓고 일어나서 마음먹었다. 처음 서울로 왔을 때처럼 다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겠다고. 커피 생두를 냉장고에 봉인하고, 대학원 시험의 합격 소식을 들었다.

“지윤이 있구나?”

선배의 목소리였다. 놀라 일어났다. 손에는 비닐봉지 위로 시장을 본 듯 부추 단이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한국 들어와도 왜 이리 바쁘다니. 집에서 너 볼 날이 없네.”

웃는 얼굴이, 안심이 되어서.

“웬 부추여요? 전 부치시게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고.

“응? 아니, 만두 먹고 싶어서. 친척집에서 김치도 받아왔어. 시큼한 게 만두 하기 좋을 거야.”
“안 더우세요?”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 선배가 다치지 않았을지 염려했던 것을 억지로 묻고, 웃음 짓는다.

“이열치열이라잖니. 남는 거야 냉동실에 넣으면 되고, 아 그리고.”

선배는 웃으며 백팩에서 작은 캔 하나를 꺼냈다. 진녹색의 작은 캔, 정육면체에 가까운 직육면체, 고딕체의 화려한 글씨로 ‘포트넘 엔 메이슨’이라고 쓰여진. 뒤늦게 그 의미를 알고 왈칵, 울음이 솟구치는 것을 참았다. 다질링. 내가 유일하게 마실 수 있는 홍차 캔. 선배가 좋아하는 건 앗삼이었다. 그리고 선배는, 옅은 다질링 보다는 짙은 앗삼이나 케냐로 밀크티를 끓여, 얇게 썬 아몬드 슬라이스를 띄워 먹는 것을 좋아했다. 선배와 함께 갔었던 대학로의 ‘차야’에서 선배가 당황했던 걸 기억한다. 진한 홍차도 우유도 버거워하는 나에게 선배는 퀸 앤 대신 다질링을 새로 시켜 주었다.

“기왕 이열치열이니까,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뜨겁게 다질링 마시자.”
“선배는 앗삼 좋아하시잖아요.”
“백화점에 작은 캔으로 앗삼이 없대. 그리고 앗삼 슈퍼브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그건 작은 캔으로 아예 나오지도 않잖니.”

속 보이는 거짓말. 선배의 눈이 흔들려서 나는 그냥 애써 웃는다.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두부를 으깨고, 부추를 총총 썰어 넣고, 다진 고기를 볶아서 넣고, 김치도 총총 썰어 물기를 짠다. 선배의 손이 빠르게 칼질을 하고 나는 베로 물기를 짜낸 재료들을 섞었다. 선배보다 내가 손이 크다. 재료는 점점 더해지고 나는 계속 잘 섞는다.

“결혼식은 언제에요?”
“응, 어제.”

태연하게 선배가 앉은뱅이 상 위에 물 대접과 만두피를 놓으며 말했다.

“며칠만 더 신세질께. 모처럼 왔더니 보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
“신세라뇨…, 제가 오히려…!”
“또 정색한다, 우리 지윤이.”

웃음.

선배는 시범을 보이듯이 갸름하게 만두를 빚고는 양 끝을 붙여 동그란 모자처럼 만든다. 선배가 ‘조명’에 몇 번인가 만두를 쪄 왔던 것을 떠올린다. 선배를 닮아 작고 둥글던 만두 속에는 가끔은 잡채가, 가끔은 김치가, 또 가끔은 불고기가 담뿍 들어 있었다. 선배는 영문과가 아니라 식영과를 가야 했던 게 아니냐고, 그나마 편하게 지내던 후배들이 놀림을 섞어 말하면, 언젠가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의 음성이니까 황송해 하도록! 깐깐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좋아하는 게 한 가지는 있다. 설사 그게 그 사람의 일상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손도 큰데 만두 참 잘 빚는다.”

선배가 웃으며 내 만두를 가리켰다.

“송편도 잘 빚겠다. 어머님이 좋아하셨겠네.”
“아뇨, 저희는 별로…, 송편 안 빚어서요. 만두도….”

말을 흐린다. 지끈, 무언가가 우는 소리. 명절이면 더 눈물짓던 그 여자. 내 목을 졸랐던 그 남자가 좋아했던 가래떡은 끝내 식탁 위에서 사라졌다. 무슨 연상 작용이었는지 송편도, 만두도, 사라졌다. 그리고는 명절이면 그렇게 세상이 무너질 듯 흐느꼈다. 지훈이, 그 여자의 희망, 그 여자가 사랑하고, 그 여자를 사랑한 유일한 아들은 그 날에도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면-. 그런데도 그들은 왜 행복해지지 못했을까. 새하얀 국화를 들고 왔던 유순해 보이던 그 남자와 새로 만들어 낸 가정조차도, 그렇게 위태롭게 무너지기 직전의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왜 그 여자는 여전히 울면서 내게 전화를 거는가. 지훈이의 말 대로라면, 술에 취해 흐느끼는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무도 없는 거다. 붉은 눈에 혀가 꼬이던 그 남자가 나를 그렇게나 혐오할 이유도 없는 거다. 그런데도 그들은 잘못 씌어져 있다는 서류를 정정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의무를 주장한다.

“진희는 요즘 안 만나니?”

지나가는 말처럼 선배가 묻는다. 나는 도리질한다. 만나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원진희가 내 삶을 휘두르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 애가 오지 않는 방에서 쓸쓸해 하는 것이나, 한없이 그 애 취향에 맞추는 것이나, 내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애에게 어울려 들어가는 것, 모두 힘이 드니까. 사랑이란 이름은 일방적으로 되는 게 아니고, 손은 혼자서 잡을 수 없는 거니까. 1학년 2학기부터 지금까지 4년간 휘둘린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처음처럼 홀로 서고.

“난 그 녀석, 싫어했어. 처음 신입생 환영회때부터, 이상할만큼 거슬렸지.”

그만큼 튀었으니까요, 선배들이 좋아할 인상은 아니었어요. 저도 알아요.

“넌 그 녀석의 뭐가 좋았니?”
“…잘 모르겠어요. 지금 와서는. 아마…, 거침없고, 오만한 것 같은 눈빛이나, 모든 게, 당연한 듯이 누리는 그런 뻔뻔함…, 그런 게 좋았던 걸까.”

“이거 두 번째 묻는 건데, 지윤아, 너 지난번과 대답이 다르네.”
“…예?”

되묻는 내 눈에 선배의 숙인 눈꺼풀이 들어온다.

“아냐, 이 쪽이 좋아. 지난번에는…, 울었거든, 너.”

선배는 소반에 가득한 만두를 찜 틀에 베를 깔고 올린다. 나는 숨이 막혀 잠시 숨을 쉬지 못하다가, 선배가 돌아와서야 하아, 겨우 내뱉었다. 잊고 있었던, 그가 떠난 날의 일이다. 잊어버리려고 했고, 잊어버렸던.

- 너 그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
- ……몰라요.

겨우 말을 뱉고 나는 도망치듯이 돌아서서 올라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계속 걷고 걸어가다 돌아서니 선배가 있었다.

- 지윤아…, 너…, 진희와…….

뒷말을 듣지 않고 나는 무너졌다. 선배, 어떻게 해요. 간대요, 원진희가 일본에 간대요. 떠남을 준비했던 건 나였는데도, 그가 떠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말 한 마디 없이, 날 떠날 준비를 했던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더 견딜 수 없던 건, 내가 그를, 여전히, 그리워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이제 얼려 놓아야겠다. 냉동실 여유 있지?”
“예. 별로 쓰지 않으니까요.”

그나마 들어있었던 생두도 내놓았고. 선배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1년 전 시간에 게속 머물러 있을 뻔 했다. 덕분에 선배와 같이 냉장고 속으로 남은 만두를 모두 집어넣고, 마침 한소큼 끓어 오른 찜통을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쿡 낮게 웃었다. 선배와 알고 지낸 시간은 길었지만 선배와 함께 이 집에서 한 것은 이삿짐을 싼 것 외에는 없었다. 가끔 내가 선배에게 커피를 내려 주긴 했어도, 선배가 가끔 보온병에 든 다질링을 내게 건네긴 했어도. 두 사람이 함께 무언가 한 것은 지금 함께 만두를 만든 것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초간장을 만들었고 선배는 야채를 오리엔탈 드레싱으로 무쳤다.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고, 선배가 끓인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서 나는 정말로 완전히 원진희를 잊고 있었다. 선배는 흥얼거리며 차게&아스카의 On Your Mark에 맞춰 발을 굴렀다. 나는 컴퓨터에 꽂힌 은색 스틱이 더 이상 짐스럽지 않았다. 선배의 그 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더없이 행복했다.

“부모님, 이혼하실 것 같아.”
“……예?”

어이없는 반문.

“아버지한테 새 여자가 생겼대. 한국에 남는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불안해했던 게 적중한 거지. 어머니한테 이혼해 달라고. 어머니는, 명쾌하게 도장 찍어 주겠다고 하고.”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웃으면서, 담담히 선배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냥 거기 계실 거라고, 수속 밟으시는 중. 한국 땅에 정떨어졌다고.”

그럼 선배는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어머니의 교환교수 건으로 나간 거였다. 2년 반, 한시적인 유예였다. 나는 선배가 돌아와 대학원에 가거나, 혹은 선배가 좋아하는 요리를 시작하거나 할 거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 모든 당연했던 것들은 실상 하나도 확실하지 않은 가정에 불과했다. 선배가 그 곳에 계속 머물 확률, 외가가 있다는 그 나라에 완전히 뿌리내릴 가능성도 그만큼 있었다. 교수님이 졸업한 학교, 교수님이 섰던 강단, 나와는 별로 상관 없던 것들이 돌연 무게감을 재고 중요한 것이 되었을 때, 노래가 바뀌었다. Say Goodbye.

“나는, 어쨌으면 좋겠어?”

선배가 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어째서 내게 물어요. 어째서 내가 그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듯이, 내가 선배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들어요. 그렇게 보지 말아요. 그런 눈동자로 보지 마세요. 선배는 늘 웃고 있었잖아요. 변함없이 그 곳에 서 있는 마을 입구의 오랜 나무 마냥, 늘 그렇게.

“그 나라에서 일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결혼을 하고,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언어 문제는, 뭐 괜찮을 거야. 공부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영문과 졸업생이니까.”

“선배가 왜 공부를 못해요, 교수님들이 선배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의미 없이 반박한다. 해야 할 대답 대신에 말을 돌린다. 무거워요.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마.

“뭐 일단은, 처음 계획대로는 거기 있을 거야. 요리 스쿨 다니거든? 한국 오느라 쉰다고 말하고 왔지만. 정식으로 중국요리 자격증 따고 올 생각이었고. 영국에서 중국 요리 자격증이라니 좀 웃긴가? 어쨌든 좀 더 생각해 봐야지 뭐. 오더라도 아버지 하고는 안 볼 테니까 서두를 필요도 없고.”

선배도 중언부언 말을 맺었다. 나는 안도한다.

“…주착이라니까, 아버지 말야. 새 여자, 이제 겨우 서른이래. 웃겨. 딸 뻘 되는 여자랑, 뭐 하는 건지.”

남의 추문을 이야기하듯이 웃음을 섞어 말하고는 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짓눌린 내 표정을 읽은 듯이.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또 나 보시고 뭐라시는 줄 알아? 네가 결혼을 아직 안한 게 제일 마음에 걸려. 현진아, 맘에 두고 있는 상대 있으면 미루지 말고 보여 줘, 래. 당신 결혼이 그렇게 어이없이 파토가 났는데, 거기서 자식을 어서 결혼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드는 건지.”

선배의 말을 그저 듣고 있었다. 그렇구나. 현진 선배의 부모님, 선배의 지갑 속에 들어 있었던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서로 마주보고 있던 그 두 분이, 헤어지는구나. 세상의 모든 결혼은 그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배 역시도 결혼을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나 현실성이 없는 일처럼 느껴졌었던 것인지.
2005/09/04 16:11 2005/09/04 16:11
그 남자 이야기, 5

박현규는 곡 하나를 다 듣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 쑥쑥해하며 일어났다. 나도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가 학년으로 돌아가며 연신 돌아서는 것은 나는 한참 보다가, ‘모노드라마’의 동아리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원진희의 잔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익숙해질 것이다. 그가 없는 1년 동안 나는 생두를 밀봉한 채 열지 않았고, 오니치카 치히로의 음반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전에는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내 취미들이 봉인되어도 나는 살아 있었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이 뭐가 있는가. 그가 내 입술을 열고 옷자락을 파고 드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그가 고백하는 꿈도, 그와 함께 먼 나라를 여행하는 꿈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그를 완전히 지우더라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이보다 더한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이거 누구야, 지윤이 아냐? 오랜만이다.”

동아리 방에서 앉아서 담배를 피던 2년차 선배가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했다. 마침 1년차 동기들도 몇 앉아 있었다. 현진 선배의 귀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원진희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는지, 물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뜸해. 가을에 연극제 올릴 거 아냐? 이번에는 학부 애들에게 뭔가 보여 줘야지 않겠냐.”

논문 초안을 교수에게 딱지 맞았다는 이치영을 마지막으로 본 게 한 달 전이었다. 한 달만에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다시는 ‘모노드라마’ 동아리방에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오히려 나를 보고 오랜만이라고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에게 논문의 일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2년차의 대학원생들에게 ‘논문’은 금기의 단어다. 동아리방에 자욱하게 깔려 있는 담배 냄새. 이치영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

“이번에는 뭐 할지 정해졌어요?”

물으니, 2년차 선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실은 ‘조명’에서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던 참이다. 우리도 이번에 논문 들어간 사람이 많아서 좀 힘들고. 조명도 중요한 애들이 몇이나 어학연수 들어가 버렸다네. 어떻게 생각해?”

왜 하필 ‘조명’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쪽은 마침 음향 담당이 신입생이라 불안한 모양이고, 지윤이 네 음향 감각이야 내가 알고. 우리쪽은 배우가 모자라고 저쪽은 배우는 충분한 거 같으니까.”

박현규가 떠올랐다. 그래도, 그 녀석이라면 분명 열심히 할 텐데. 내가 냉큼 들어가서 음향 담당을 맡아버리면, 그러면, 박현규는 괜찮을까.

“거기 음향은, 사람 있을 걸? 그, 누구더라. 영문과의 99, 지윤이 너 동기, 이번에 복학한다는데. 음향 담당이잖아?”
“뭐, 꼭 음향만 문제인 건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이번엔 배우가 모자라니까 하는 소리지.”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연극 동아리라는 것은 확실히 드문 일이다. 동아리 활동들 중에 시간을 전혀 빼앗지 않는 것이야 없겠지만, 함께 많은 시간을 협의하고 어느 인원 이상의 꾸준한 참여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 대학원생이라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다. 현진 선배가 이 동아리를 소개해 주었을 때, 그리고 가을 연극제에 참여했을 때에도 나는 이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잘 몰랐다.

어떻게든 연극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모노 드라마’의 사람들 중에 연극 전공자는 없다. 그들 중에 연극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게 될 사람이 과연 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의 선배들 가운데에는 지금 어느 극단에서 조명을 담당한다거나, 유학을 가서 연극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거나 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던 모양이지만, 최근 몇 년간 ‘모노드라마’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집단이었다.

“마침 그쪽 대본 초안 봤는데, 괜찮더라구. 거기 각본 하는 녀석, 쓸만하더라. 대학원에 꼭 오라고 꼬시고 싶을 정도였어.”

중언부언, 선배는 말이 길어진다. ‘조명’과 함께 무대를 만든다면 원진희를 마주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진희는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한 마디씩 좋은 평들을 해주곤 해서 조명 사람들로부터 ‘촌철살인’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였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쪽에서 그를 피하는 것이 이상한 소문으로 불거져서는 안 된다. 나는 소문이 어떻게 사람을 침몰시키는지 안다. ‘그 남자’가 어떻게 몰락했던가. 아직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그 해 오월, 그는 5월 쟁투의 최루탄을 온 몸에 덮어쓴 채로 집으로 돌아와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물처럼 맑은 술을 빈 속에 계속해서 들이키다가, 내 목을 졸랐다. 숨이 막혔다. 버둥거려도 내 팔은 그 남자에게 닿지 않고, 그 팔을 뿌리치거나 밀어낼 힘도 없었다. 붉은 눈으로, 최루탄 매운 냄새 그대로 옷에 남아서, 나쁜 년 죽일 년, 그 남자 그렇게 흐느끼다가, 어느 순간 손에 힘이 풀리고, 내 너머 누군가를 보고, 뒷걸음질 치고.

…그리고 그는 발을 헛디뎌 그대로 추락했다. ‘그 여자’는 흐느끼고, 통곡하고, 나를 슬금슬금 지나쳤다. 눈이 붉었던 건, 쓰라린 눈물이 계속 그렇게 흘렀던 건, 그 최루탄 매운 내음이 묻어서. 조합의 간부도 아닌 그저 흔한 보통의 직원이었던 그 남자의 죽음은 술에 취한 실족사였다. 조합에서는 흰 국화 화분 하나를 보냈다. 검은 리본이 묶인 흰 국화, 그 화분을 들고 왔던 남자. 그 때에는 그 남자가 그럴 줄 몰랐지. 그 남자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그렇게나 동료의 죽음에 무겁게 짓눌렸는지.

“지윤아?”

퍼뜩 놀라 고개를 드니 선배가 나를 본다.

“뭐해, 지금 가 보자는데. ‘조명’에서 연락 왔다니까.”

얼떨결에 일어나니 이미 다른 사람은 다 나간 후다.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조명’에 들려 음향 쪽의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멀찍이 서 있는 원진희는 몇 번 나를 보았지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말이 공동 작업이지 우리가 거의 기술지원과 배역지원을 하는 정도였다. 연출을 누가 맡느냐로 조금 이야기가 늘어지긴 헀지만 연출 쪽의 사람들이 다 논문에 들어가서 우리가 맡기는 힘들었다. 학부 3학년생인 ‘조명’의 연출들도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가 길어진 덕에 집으로 돌아온 건 열 시가 넘어서였다. 여럿이서 소주 몇 잔을 기울이긴 했지만 나는 별로 마시지 않았다. 녹두거리의 얼큰한 김찌찌개에선 떠난 고장의 맛이 났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술에 비해 안주는 부족했고, 나는 이야기를 술 삼아 안주 삼아 그렇게 있었다. 오피스텔 근처에 아직 문이 열린 떡볶이집에서 김말이 튀김 두 개를 넣은 떡볶이 일인분을 사고는, 선배 생각에 어묵도 1인분을 샀다. 혹 남더라도 어묵은 다시 끓이면 내일 아침에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기대한 것과는 달리 선배는 집에 없었다. 더운 열기를 씻으려 창을 열었다. 순간 바깥이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거센 빗줄기가 쏟아붓기 시작했다. 장마철이 시작된 것일까. 문을 연 채 한참을 쳐다보았다. 원진희는 비를 싫어했다. 비도 눈도 너무 쨍쨍한 태양도 싫어하는 도시 사람이었다.

혼자 먹는 저녁은 지독하게 맛이 없다. 떡볶이 양념에 무친 김말이는 멍하니 있던 사이에 튀김옷이 양념에 불어서 뭉클해졌다. 소주 두 잔 들어간 속에서는 고춧가루가 부담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나는 채 반도 못 먹는다. 늘 하던 일인데. 봉인한 커피를 풀어낸 때문일까. 아니면 조명에서의 원진희 때문일까. 샤워하다가 돌연 욕지기가 치밀어 저녁 이후 먹은 걸 모두 토해냈다. 시큼한 내음에 비위가 거슬려 물까지 모두 토해낸다. SOS, 몸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소리. 바보같지 굴지마. 익숙해져. 기대하지 마. 내가 떠나온 그 공간에서 원진희와 최나영이 뭘 했는지 같은 것, 상상하지 마. 원진희가 최나영의 어깨를 감싸고, 키스하고, 그리고….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안긴 바로 그 침대에서 곧장 최나영을 안지는 않았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는 내킬 때마다 나를 안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1교시 수업을 준비하는 날 안고, 프리젠테이션에 할 말을 중얼거리는 내 입에 키스해왔다. 그게 어디 원진희만의 문제였던가. 원진희가 그럴 때, 거절 한 번 제대로 안했던 나다. 입바랜 저항을 조금 하긴 했어도 그건 그저 원진희에게는 다른 효과만 줄 뿐이었다.

비틀비틀 쓰러지듯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버린다. 스프링이 끼익 운다. 빗소리가 들린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쿵쿵 심장이 뛴다. 그거 알아, 원진희? 나는, 비를 좋아했어.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공기에 습기가 촉촉이 젖어드는 날, 너와 함께 듣는 나카시마 미카, 그 목소리가 좋았어. 심장을 도려낼 듯이 내게는 절절했어.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니.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네가 사랑하는 건 늘 너 자신 외엔 없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반쯤 잠에서 깬 상태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던가. 걸음걸이가 타박, 마루 위로 옮겨졌다. 아아, 선배다. 몇 시쯤 되었을지 시계를 보려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윤이, 자니?”

산울림처럼 멀리, 실제보다도 답답하게 소리가 울린다. 대답하지 못한다. 선배가 빼꼼이 내 방문을 열고는 잠시 멈춘다. 열쇠로 잠그는 것을 잊었다. 뭄을 닦고 옷을 입지도 않았다. 선배는 천천히 다가와 깊이 한숨을 내 쉬었다. 왜 그래요 선배, 보고 있지 말아요, 선배 표정도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아픈 숨을 내뱉지 말아요. 왜 그렇게 서 있는 건데. 선배가 내게 다가와, 내 목덜미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이 바보야.”

선배가 중얼거리고, 내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문 손잡이 버튼을 꾹 누르고 선배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이건 꿈이다. 감히 내가 과분한 욕심을 내고 있는 거야.
2005/08/13 16:08 2005/08/13 16:08
그 남자 이야기, 4

학생회관은 ‘학관’이라는 줄임말과 함께 미로라고 불린다. 일설에 의하면 몇 회인가의 건축과 졸업생이 디자인 했다고 하는데, 그 예술적 기질이 그리 효율적이진 않았던 게 분명하다. 학교가 전체적으로 산에 지어졌으니 도로가 오르막이라, 입구가 반지하 비슷한 계단 아래에 있는 거야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1층에서 계단으로 올라서 조금 돌다 보면 다시 1층이라거나, 2층 복도에서 걷고 있었는데 3층이라거나 하는 일을 몇 번 겪다 보면 학교에 대한 회의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악명 높은 학관의 문구점에서 바닥을 보이는 연습장과 만년필 잉크 같은 것을 이것 저것 사고, 추가로 3M의 인덱스 레이블을 샀다.

- 왜 날 지도교수로 하고 싶다는 건데?

교수는 귀찮아하는 기색으로 나를 보았었다. 대학원 면접 때의 일이다.

- 번역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작품을 우리 나라 말로 옮기는 작업이 매력적….
- 교과서 읽나?

대뜸, 교수가 말문을 막았다.

- 딱히 심각하게 질문한 건 아냐. 그렇게 긴장해서 대답할 거 없어. 장래에 교수가 되고 싶다거나 하면 줄을 잘 설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그런 뜻으로 한 말이니까.

교수는 그 때부터 그랬다. 항상 직설적이었고, 적어도 학생들에게는 말을 거르거나 우회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될 오해를 받고는 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 나이에 전임강사 자리에 오른다는 것은 한 두 번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이 아닐 거라고 짐작할 수는 있엇지만.

학관 3층에 있는 ‘조명’의 방은 비어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서 이야기가 길어졌거나, 아니면 중앙 도서관 근처 잔디밭에서 술잔을 나누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근처가 아니라 혹 순대거리까지 내려 갔다면 아직 돌아오기에도 이른 시간이다. 어쩐지 허망해져서 곧장 모노드라마로 갈까 망설여진다.

“저,”

돌연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짧게 자른 고등학생 머리를 한, 아직 새내기로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조명 사람이예요? 이 사람들 점심 먹으러 가서 안 온 거 같은데.”
“……저, 저, 99학번 한 지윤 선배님이시죠?”

당황해서, 에? 하고 어이없는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내가 언제 만난 적 있었던 사람인가. 한 두 번 보았던 조명의 작년 후배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이 고등학생의 얼굴은 기억에 없었다. 교수님 대신 휴강안내를 하러 들어갔을 때 만난 사람일까. 그들이 내 이름이나 학번을 알 리 없다. 대학원 학번도 아닌 학부의 것을.

“응, 그렇기는 한데….”

어미語尾를 흐리고, 다시 얼굴을 살핀다. 여전히 기억에 없는, 짙은 눈썹과 두툼한 콧잔등의, 묵묵하고 강할 것 같은 인상을 언제 보았나.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이십 오 기 박현규입니다. ‘조명’에서 음향 공부하고 있습니다.”

언뜻 충청도의 억양이 섞여들었다. 가 본 적 없는 지역, 느릿하고 여유로운 사람들이 산다는 선입관에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아까 오형기가 말했던 것이 생각난다. 무대 아래에서 나를 보았다는 후배가 있다고. 담배 냄새조차 배어 있지 않고, 긴장한 듯 초록색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는 손도 아직 어린 티가 남아 있었다. 이런 후배라니, 나보다 한참 아래인 나이의, 저 순수한 눈빛이라니. 해마다 새내기들 대부분은 해방의 눈빛으로 또는 도전의 눈빛으로 대학 교정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봄, 학관과 중앙도서관을 포함한 교정 전역에 꽃처럼 넘실대던 pc에 피가 끓는 사람도 있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목표 의식이 사라지고 대학의 명성이 곧 자신에게 그대로 주어지는 양 굴었다. 적지 않은 수가 학교를 견디지 못한다. 누군가는 전공을 잘못 고른 탓이라며 전과를 준비하고, 누군가는 대학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시스템을 비난한다. 초 중 고등학교를 계속해서 한 동네의 친구들과 다닌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과에 단 한명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상황에 힘들어하기도 했다. TV에 나오는 대학생이란 그저 화면 속 신기루일 뿐이라는 것을 절감하기 전에 그나마 자신에게 맞는 동아리에 가입하거나 전공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불태울 수 있는 경우는 행운이다.

“그래, 만나서 반갑다. 점심 먹었어? 어디, 커피라도 한 잔 할까?”
“저는 율무차 마시겠습니다.”

대뜸 굳어서 대답한다.

종이컵에 율무차 한 잔. 현규는 고개를 꾸벅 하고는 공손하게도 그 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둘이서 학관 뒤편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늘이 진 데다가 마침 담배 피는 사람도 근처에 없다. 오늘은 운이 좋다.

“무슨 과 다녀? 나는 영문과인데.”
“법학과입니다.”

면접이라도 보는 듯, 굳은 얼굴에 웃음이 나와 버렸다. 교수님이 면접때 내게 느낀 게 이런 거였을까.

“긴장 풀어. 내가 무슨 교수라도 되니? 어깨 힘 빼고, 불편하면 난 그냥 일어날 테니까.”
“아, 아닙니다.”

얼굴을 붉히며 현규가 벌떡 일어나려다, 도로 앉았다. 내가 갈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나이 차이가 적지 않은 선배니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인상이 약해서인지 선배라고 날 불편해 하는 후배는 별로 없었다. 대학 졸업반일 때도, 대학원에 들어온 후에도 마찬가지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올해는 ‘조명’에 한 번도 안 갔는데.”

“작년에, 무대에서 봤습니다. 저… 형이 학교 선배라서, 연극제 보러 왔었는데.”
“충청도에서 연극제를 보러 올라와?”
“저, 재수 했습니다. 형은 작년에 현역으로 들어가서….”

느리고 적은 말에도 상황은 대충 잡혔다. 쌍둥이 둘이 같은 학교에 시험을 치고, 둘 중 하나만이 합격하고 박현규는 서울에서 재수를 한 모양이다. 꽤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형이 연극제에 초대했다고 응하는 걸 보니 보통은 아니다.

“형이 연극 했어?”
“예, 조명에 있었는데…, 2학년 되어서는 그만 뒀습니다.”
“아, 박진규?”

전혀 다른 인상의 24기 녀석을 떠올렸다. 눈매가 날이 서 있었던 법학과 박진규는, 처음부터 연극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연기를 하고 싶어했지만 연습에도 열의가 없었고, 배역의 대사 수가 승부거리인 듯 굴었다. 평준화가 되지 않은 지역의 일류고 수석 졸업생들이 종종 보이는 특성을 고스란히 가진 녀석이었다. 어쩐지 그 뻣뻣함에 원진희가 떠올라서 유심히 보고 있었는데, 연극제에서 조연을 맡고 나서는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서투른 거야 누구나 처음엔 마찬가지다. 발성이 딸리고 억양이 분명하지 않다고 꾸짖긴 해도 그것만으로 누군가가 연극에 맞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박진규가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아아 역시, 라고 생각했었다. 쌍둥이라면, 꽤나 다른 쌍둥이다. 얼굴로 닮지 않은 걸 보면 이란성인 걸까.

“연극 한다니까 박진규가 안 말려?”

웃으며 물었다. 박현규가 고개를 마구 내젓는다.

“혀, 형이랑은 다르니까요. 저는, 무대에, 그 소리들이 너무 좋아서…. 연극은 그 때 처음 보았는데요.”
“그랬구나. 그 뒤로는 연극 뭐 본 거 없고?”
“저, 작년 가을에요, 대학로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학원 끝나면 곧장 가서, 지하철 1호선,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장이, 관객모독, 난타에다 풋루스 같은 뮤지컬류도 다 보고.”

꽤 유명한 제목들이 줄줄이 입에서 나온다. 지난 가을부터 보기 시작했다면 상당한 양이다.

“어느 게 제일 좋았어?”
“지하철 1호선이요.”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박현규의 눈이 빛났다.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눈이다. …원진희가 생각났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건, 원진희가 저런 눈을 하는 거였다. 저런 눈을 할 때는 날 안을 때 뿐이었다. 거칠게 내 입 속을 혀로 휘저은 직후나, 내 안으로 밀고 들어올 때, 원진희는 저런 눈을 했다. 목마른 것 같은, 열망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랬을까. 그의 목을 끌어안는 내 표정이 그랬을까. 뜨겁게, 눈물 흐를 듯이 달아오르던 내 눈동자도 그런 빛을 띄고 있었을까.

“그거 좋지. 초연 때랑 많이 바뀐 거 알고 있어?”
“예, 작년에 보고 얼마 전에 보니까, 또 바뀌었더라구요. 거기 음악이 너무 좋아서…, 각본도 연기도 좋지만요.”
“응. 편곡이 김민기씨일 걸. 연출이랑. 최고지.”

그의 얼굴을 지우듯이 박현규의 말에 보조를 맞춰 주며 웃었다.

“예, 저, 안되는 거 알지만, 녹음 떠 왔어요. 너무 좋아서.”

박현규는 오른쪽 가슴에서 그를 닮은 검정색의 투박한 mp3p를 꺼내 보였다. 정말로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어떻게 법학과를 갔어? 별로 안 어울리잖아? 연극이랑 법학.”

“아니에요, 법학도 좋아해서요. 재미있어요. 저 민총-, 아, 아니 민법총칙이랑 법학개론 듣고 있는데, 꼭, 좋은 음악 들었을 때처럼 쩌릿해요.”

그가 벙싯 웃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내애의 얼굴은 저런 빛을 낸다. 나는 다시 원진희의 생각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에게 내가 그런 존재이기를 바랐었다. 그가 무언가를 갈망하기를, 내가 음악 소리에 취하고 커피 향에 취하듯이 그에게도 무언가 간절한 것이 생겨나기를. 하지만 모든 것은 원진희에게 닿는 순간에 그의 것으로 녹아들 뿐, 그의 갈망이 되지는 못했다.

“나 그거 CD 있어.”

뒤적여 CDP를 꺼냈다. CD 지갑에 들어 있는 몇 장의 CD 중에 지하철 1호선 음반을 찾은 순간, 박현규의 눈이 빛났다. 나는 CDP에 들어 있었던 나카시마 미카의 ‘MUSIC'음반을 꺼내고 지하철 1호선 CD를 넣었다. 오래 된 CDP의 젠하이저 이어폰 한 쪽을 박현규에게 건넨다. 주저하다 받은 끝을 왼쪽 귀에 걸치길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내 손에 있는 다른 한 끝에서도 낮은 음악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른하고 편안한 느낌. CDP에서 들리는 노래는 역동적이고 힘찬데도, 나는 마치 유키 쿠라모토의 음악을 듣는 듯이 편안해진다.
2005/08/02 16:06 2005/08/02 16:06
그 남자 이야기, 3

전철역에서 내려서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와야만 하는데도 지하철역은 학교 이름을 따서 지어져 있다. 다른 역에서 내리는 것보다야 이 역에서 내리는 게 가까운 게 사실이지만. 마을버스를 타는 정류장 근처에는 아침 일찍부터 정신없이 지하철에서 졸린 눈을 부비며 떠밀리는 비 기숙사생을 노린 에스프레소 점이 있다.

한국에서 아마도 가장 큰 도시일 이 ‘특별시’에 처음 올라왔을 때를 기억한다. 대학을 찾아오기 위해서 지하철 노선도를 보니 대학 이름을 딴 역이 있었다. 어머니 몰래 논술고사를 치러 올라왔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내게 비행기 티켓을 쥐어 주셨다.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만 논술 시험을 치러 갈 수 있어서였다. 나중에 갚아, 라고 웃으시더니 정작 나중에 갚으러 찾아갔을 때는 짐짓 화난 얼굴로 사양하셨다.

합격하던 날, 어머니는 울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있는 국립대학을 다니기를 원했는데, 내가 그 날짜를 이 대학으로 응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사립대를 보낼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국립대조차도 집에는 돈이 없었다. 장학생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 어머니의 소망을 저버리고 나는 여기로 와 버렸다.

떠나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 고장을 떠나고 싶었다. 바닷바람이 습윤한 바람을 불어대는 눅진한 여름, 소금 냄새 묻어나는 건조한 겨울, 흘러가는 사람들이 멈춰 있는 사람보다 많은 그 고장을 떠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아니, 떠나고 싶었던 것은, 붉은 얼굴로 누워 있는 누군가였을까. 아니면 술기운에 허리띠를 빼어드는 그 사람앞에서 몸을 웅크리고 그저 버티고만 있었던 다른 누군가였을까. 참지 못하고 나다니는 누군가였을까. 아니면 힐끔대는 사람들의 시선이었을까.

에스프레소 샵에서는 커피를 태우는 냄새가 난다. 나는 조금 얼굴을 찌푸리고 막 도착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산길을 지나 학교 교문 안으로 들어가, 중앙 도서관 앞에서 내렸다. 대학 안은 항상 온도가 조금 낮은 기분이 든다. 산이라서일까. 3월 늦게까지 학생들은 코트를 입고 다녔고, 여름에도 다른 곳보다는 선선하다. 오늘은 꽤나 햇살이 따가운 편이지만. 나는 그늘을 따라 교수님의 연구실까지 천천히 걸었다. 학생회관에서 빠져나오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학부 연극 동아리 중 하나인 ‘조명’ 사람들이었다.

“지윤선배, 오늘 등교일이세요?”
“아니, 오늘은 조교 일 때문에. 오늘 동아리에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냥 같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하는 거죠 뭐. 가을 연극제 이야기도 좀 하고요. 야야, 인사해. 우리 음악 담당하셨던 한지윤 선배님. 99학번이시고, 지금은 ‘모노드라마’에 계셔.”

새내기 같아 보이는 쑥쑥한 얼굴들이 머쓱하게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아, 이십오기 누구누구입니다. 맞춘 듯한 인사도 그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쿡쿡 웃음이 배어 나오는 것을 겨우 참고 진지하게 응응, 반갑다, 대답한다.

“참 선배, 그 쪽은 어떻게 해요? 올 가을에 무대 올리실 거죠?”

몇 기 아래의 회장, 02학번인 오형기였다. 나는 난처하게 웃었다. 원진희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는 동아리 방에 가지 않았다. 연극제의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음악을 담당할 사람이 새로 하나 생겼으니 내 자리가 비어도 그리 곤란하지는 않겠지 위안한다.

“저희 쪽에도 좀 들러 주세요 선배. 고등학교 때 선배 보고 들어왔다는 애가 하나 있는데.”
“무대에 선 것도 아닌데 날 어떻게 봐?”
“저희 쪽 음악 담당하는 애인데, 선배가 무대 아래에서 음향기기 만지는 걸 봤대요.”

대학원 연극 동아리 ‘모노드라마’는 대개 학부에서 연극 동아리였던 사람들이다. ‘조명’ 출신의 멤버는 지금 나와 원진희 외에 둘이다. 학교에 있는 여러 연극 동아리들이 벌이는 가을 연극제의 주체는 학부 연극 동아리들이지만 ‘모노드라마’도 항상 찬조 형식으로 참여했다.

“이번에는 창작극 올릴 거야?”

“예, 창작극이고. 대본은 제가 초고 잡고 같이 의논 하려고 하는데. 음향이 잘 안 잡혀서. 선배 언제 한 번 들러서 그 후배 녀석 좀 지도도 해 주시고요.”

싱글싱글 오형기가 웃는다. 새내기일 때는 어떻게 저런 애가 연극을 하나, 싶게 수줍더니. 의외로 재능은 극작 쪽이었다. 오형기가 어떻게 미시경제학 같은 것을 파고드는지 때로 신기하게 느껴진다. 아버지가, 모 기업의 사외이사라고 하셨던가.

“그래, 시간 내서 한 번 들를께. 밥도 사 주고 그래야 되는데 지금은 교수님 호출이라 안 되겠네. 담에 보자. 새내기들도 잘 가라.”

손을 가볍게 들고 걸음을 재촉했더니 새내기들이 또 꾸벅 고개 숙인다. 안녕히 가십시오 선배니임. 후배들이나 선배들과는 사이가 나쁜 적이 없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호의와 적당한 베품과, 받음. 유독 힘든 건 원진희였다. 사감이 들어갔으니 그런 거지. 그렇게나 바람 같은 녀석. 내 곁에 머물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섣부른 기대를 하고.

교수님의 방이 있는 연구동까지 걸어가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어느새 등줄기에 송글 땀이 맺혔다. 땀을 많이 흘리는 편도 아니고 몸은 찬 편이지만, 땀을 흘리지 않아서인지 심하게 더우면 오히려 탈진을 일으키곤 했다. 위태해질 정도로 더운 여름에는 버스에서 내려 교수동까지의 길도 천천히 호흡을 느리게 해야 했다.

교수님의 연구실은 2층 끝방. 북향인 탓에 여름이면 꽤 빛이 들어온다. 문 앞에 플라스틱 판에는 ‘수업중’ 이라고 되어 있지만, 수업 중을 알리는 플라스틱 판이 두 개라는 걸 나는 안다. 초록색은 실제 수업중이라는 것, 노란색은 방 안에 있다는 뜻이다. 똑똑똑똑똑. 노크는 다섯 번. 쉼 없이 연속. 교수님은 소리를 죽이고 걸어와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문을 빼꼼 열고 나를 보셨다.

“올해 1학년들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어.”

내가 따라 들어올 것을 알고 교수님은 그대로 등을 돌려 들어가 버린다. 나는 문을 닫고 빙긋 웃었다. 수업 중에 누가 또 질문에 서툰 대답을 했으리라. 나이 때문에 밀려서 1학년 개론 수업을 해야 한다고 한숨을 쉬시더니,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1학년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으셨다.

“부른 건, 이거 좀 번역해 보라고.”

교수님은 두툼한 원고 뭉치를 내게 내밀었다. 중편 정도의 분량이다. 항상 원고는 이렇게 출력본으로 왔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인지.

“가을쯤에 광고 때리면서 낼 거란다. 한국계 캐나다인 여류 작가라네? 영문 중역본은 아니고. 그 작가가 영어로 쓴 거. 너무 어릴 때 캐나다로 가서 우리말로 소설은 못 쓴다고.”

“예에.”

“대충 읽어봤는데, 읽을 만 하더라. 자기 어렸을 때 이야기인가 봐. 70년대 한국 분위기가 꽤 생생해.”

첫눈에 들어오는 문장들이 꽤나 미려하다. 꼭 비교한다면 르 귄 분위기일까. 그 할머니는 장르 쪽이지만.

“현진이 들어왔지?”

교수님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나는 한참만에야 놀랐다. 지도교수도 아니었고 수업을 하신 것도 아니다. 이름이나 얼굴 정도야 알 수 있지만, 진학하지 않은 학생의 현재 위치까지 아실 수 있을까.

“현진이 엄마가 나랑 사촌간이거든. 그래서 들었지. 그 녀석, 그 나이 먹도록 대체 정착을 못한다고 푸념이더라.”
“…예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렇게 대답한다.

“너 혹시 걔 애인 알고 있어?”
“…예?”

“영국에서 꽤 괜찮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공세를 해 왔나봐. 교포 2세인데. 엄마는 맘에 들어 하는데 현진이가 무척 강경했다네. 나보고 알아보라나. 근데 내가 그 녀석을 뭘 알아야지. 말이 좋아 오촌이지, 영국 들어가기 전에도 잘 알고 지내지도 않았는걸.”

“죄송합니다. 사적인 이야기는 별로 들은 게 없어서요.”

사실이었다. 선배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영국에 가게 되었을 때에나 겨우 어머니의 직업에 대해서 들었을 뿐이다. 선배가 교수님과 오촌 숙질간이라는 것도 오늘 알게 되었는데.

“그래, 그럼 그거, 출판사에서는 두 달 마감 줬으니까, 두 달 내로 좀 해봐. 네가 넘기면 검토 좀 하고 마감 좀 넘겨서 내지 뭐. 어차피 저 쪽에서도 마감 지키는 거 기대 안할테지.”

교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면 돌려서 말하는 압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교수님은 진심이었다. 그래도 가능한 한 빨리 해서 넘겨야 될 테지만.

“그럼 가 봐. 내일은 수업 있으니까 아침에 오고.”
“예.”

일어나서 꾸벅 인사하고 연구실을 나왔다. 문의 잠금장치를 꾹 누르고 닫는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 버렸으니, 정말 오형기의 말대로 오랜만에 ‘조명’ 동아리 방이나 들러 볼까. 아니 그 전에, ‘모노 드라마’를 들르는 게 먼저다. 가을 연극제에 참석하는지, 한다면 나는 뭘 하면 되는지 물어 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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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백 글이 먼저 올라오는 바람에, 지난 화 남은 반을 그냥 붙여 버렸습니다. (...)
2005/06/02 16:04 2005/06/02 16:04
그림자의 노래, 그 남자 이야기 두 번째

때로 잊어버리고자 하는 일들은, 잊고 싶지 않은 것보다 더욱 더 선명하게 각인되어 뇌리에 남는다. 1학년 때의 일들이 그랬다. 내가 그를 처음으로 만난 이후로 그와 마주쳤던, 혹은 스쳤던 순간이 하나 하나 지금까지도 생생한 것이다. 잊어버릴라 치면 꿈에 나타났고, 잊으려 하면 그 장소를 지나쳤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현진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식탁 위에는 바삭한 토스트와 반쯤 노른자를 익힌 달걀 프라이가 우묵한 유리 그릇에 덮여 있었다. 선배가 즐기는 핑크색 하트 모양 포스트잇도 거기에 붙어 있었다. 영국에 가서조차 이 습관은 바뀌지 않았구나. 항상 선배의 가방 안에 핑크색 하트형 포스트잇이 들어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선배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때로는 학회실 문에 “한지윤, 수업 마치고 서클실로 와라!” 라는 메모가 붙어 있기도 했고, 도서관에서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내 자리에 “45도 각도에 나 앉아 있다. 오면 커피값으로 손 한 번 흔들어 줄 것.” 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기도 했다. 그 메모가 선배인 듯이 반가워서 씻기도 전에 유리 그릇을 열었다. 아직 토스트에도, 달걀 프라이에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커피를 볶았다.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고, 망사로 된 로스팅 기구에 한 번 마실 양의 생두를 넣고 볶는다. 적당한 거리, 적당한 세기, 원두를 볶는 방법이라는 건 그래서 애매하다. 사람마다 적절한 세기는 다를 수 있다. 생두의 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그 날의 습도에 따라서도 조금씩 변한다. 푸른빛이 감도는 모래빛 생두가 윤기를 머금은 진갈색으로 변하는 것은 때로 경외심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따뜻한 원두를 핸드밀로 드륵드륵 갈고 있으면 얼핏 새어 나오는 아득한 커피 향에 정신을 놓고 싶어질 정도다.

새하얀 도자기 드리퍼에 거름종이를 깔고, 막 갈아낸 원두를 올린다. 서버 위에 드리퍼를 놓고, 갈린 원두 위에 끓는 물을 둥글게 부으면, 물기를 머금은 원두가 불어나면서 고운 거품이 일어난다. 그 빛깔을 뭐에 비교하면 좋을까. 황금빛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그 짙은 거품, 하나하나가 모두 향으로 만들어 진 것 같은. 천천히 원두 위로 떨어지는 물은 갈린 원두를 지나면 짙은 갈색의 커피 액으로 떨어진다. 이 순간이 가장 좋았다. 원두를 볶고, 갈고, 한 잔의 커피를 준비하는 시간. …그는 커피를 내리는 나를 물끄러미 보곤 했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을 느끼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커피를 내렸다. 현진 선배도 그랬다. 현진 선배의 집에서 처음 커피를 볶았을 때에도,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등 뒤에 앉아서 나를 보고 있었다. 궁금해진다. 그 두 사람, 내 등을 왜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을까. 한 마디 말도 안 하고서.

토스트를 계란 노른자에 적셔 먹고 있으니 핸드폰이 삑삑거리고 울었다. 문자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별로 없다. 어머니는 전화를 할 테고, 대부분의 후배 녀석들이나 선배들도 전화를 먼저 하는 편이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 내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대부분 하나였다. 먹던 토스트를 내려놓고 책상 위 충전기에 꽂혀 있는 핸드폰을 열었다. 최신형 카메라가 달렸거나 mp3p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핸드폰은 내게 필요 없다. 전화를 걸고자 하는 사람들과 문자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두 가지 기능만으로 충분하다. 지금은 회사 이름조차 바뀌어 버린 중소기업의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 연구실에 들를 것.

눈에 익은 번호. 교수님이었다. 4학년 때 드라마 수업을 들은 인연으로 대학원 지도교수가 되고, 지금은 내가 조교로 일하고 있는 사람. 지금 현재 내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한 사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는 문자로 오고 가지 않는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이라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지만 행로를 수정한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다른 하나의 충전기에서 CDP의 여분 배터리를 챙기고, 남은 토스트를 마저 먹고 나서야 아직 세수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피식 웃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선배가 가장 먼저 보는 냉장고 앞에다 노란 포스트잇을 붙였다. 선배에게서 배운 버릇이다.

- 학교에 가요. 늦을 지도 모르구요.
p.s. 토스트랑 계란 맛있었어요.
저녁 굶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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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절반만 먼저 올려둡니다.
2005/05/18 16:00 2005/05/18 16:00
갑작스럽게 문소리가 났다. 벌떡 놀라 일어났다. 이 집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더라. 내가 그에게 열쇠를 준 적이 있었나? 아니, 내가 이 곳으로 이사 온 건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이다. 어디쯤인지도 그는 오늘 겨우 알았다.

"지윤이, 들어왔구나?"

방문만 빼꼼이 열고 불안스레 내다본 현관에는 이현진 선배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보다 선배 손에 들린 짐에 먼저 눈이 갔다. 돌아온 건가. 그럼, 나가야 하는 걸까.

"사촌 동생이 결혼해서, 결혼식 가 보느라 잠시 들어왔어."

내 맘을 읽은 듯이 선배가 말했다.

"잠시만요 선배, 저 옷 좀 입고요."
"응, 그래라."

주섬주섬 티셔츠에 반바지를 꿰어 입고 나갔을 때 선배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주전자는 선배 것이었다. 이 집에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핫초코 갖고 왔다. 지윤이, 너 먹을 수 있지?"
"예…."

헐렁한 옷차림의 선배는 내가 처음 이 집에 초대받았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핫초코를 끓여서 내게 내밀었다. 내가 잔을 두는 위치나 선배가 잔을 두는 위치는 같다. 맥심 커피의 사은품 머그, 핫초코가 달콤한 김을 뿜는다. 여름 날씨지만 찬물 샤워로 몸이 추워서인지 그 김이 반갑다. 늘 신기했었다. 선배는 어째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표정이 나쁘다, 너. 설마, 진희한테 연락 온 거야?"
"…귀국했어요. 오늘 만나고 왔어요."

선배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 녀석은 너한테 나빠."
"…아하하."

선배에게 처음 원진희와의 일을 고백했을 때, 선배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그 때도 선배는 저 말을 했다. 그 녀석은 너한테 나빠. 좋아한 건 나였다. 그러니, 원진희가 내게 손을 뻗었을 때, 나는 당연히 응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지만,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쓸어주고,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내 옷을 벗기는 온기가 그 의미일 거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나는 저 방 쓸 테니까 신경 쓰지마. 며칠 있다가 돌아갈 거니까."

선배가 골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선배, 거기 짐 가득 들어차 있어서..., 먼지도 많구요."
"먼지는 청소 하면 되고. 몸 누울 자리는 있어. 괜찮아. 코드 있으니까 노트북 쓰면 되고."

선배는 슥 일어나서, 욕실 문을 열었다.

"나 피곤하니까 씻고 잔다. 지윤아, 방문 잠그고 자라. 내가 덮쳐버리고 싶어지면 곤란하니까."

풋, 웃고는 설거지를 하려고 일어났다. 선배가 수트 케이스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딸깍, 문을 잠갔다. 선배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선배가 이 편이 편하다면, 나는 그대로 해 주는 것이 옳다. 컴퓨터를 켜고, 교수님께 받아온 원고를 뒤적였다. 교수님이 훑어본 후 이 글은 교수님의 이름을 달고 나가게 될 것이다. 젊고 유능한 교수. 매년 많은 양의 책을 번역해 내는 대외적인 이미지 덕분에 30대의 나이에 전임강사 자리에 올라 있어도 사람들은 납득했다. 그건 나와 교수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내가 교수님의 일을 해 주는 대신, 교수님은 조교 월급 외의 수당을 내게 주었다. 다른 곳에서 일을 받아 하는 것보다 나은 수입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번역 일에서 대학원생이, 자기 이름을 책에 낼 수 있을 정도의 일을 따내기는 힘들다.

딸랑, 문 밖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선배의 열쇠고리에서 나는 소리다. 은으로 만든 열쇠고리. L.H.J. 선배가 영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앞 금은방에서 은으로 된 열쇠고리를 주문했다. 이니셜끼리 체인 두 개로 이은 디자인을 밤새 끙끙 구상해서 들이대고, 완성품이 나온 것이 선배 출국일이었다. 집을 빌려준 데 대한 감사 표시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선배가 남겨놓은 집 열쇠 중에 하나를 거기 끼워서, 떠나는 선배 손에 건넸었다.

- 한국 들르시면 꼭 집에 오세요, 호텔 같은 데 묵지 마시고요.
- 야, 이거 눈물 날 것 같아, 지윤아.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열쇠고리를 꼭 쥐었다. 선배는 두 번 돌아보았고, 내게 열쇠고리를 짤랑, 흔들어 보였다. 그 소리를, 다시 듣기를 기대했었다. 원진희와의 일을 아는 것도 선배가 유일했다. 오래 전,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 마르케스를 읽고 있을 때, 말을 걸어온 상대가 선배 뿐이었던 것처럼. 내게 동아리를 권했을 때 연극부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도, 선배의 동아리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피붙이처럼 그렇게 편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런 날, 몸 안에 아직 욱신대는 감각이 남아 있는 이런 날에, 혼자 깜깜한 방에 잠드는 것은 서글프다. 옆방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은 훨씬 누그러져서, 나는 깊이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음악을 틀지 않은 채로 나는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오래전 꿈을 꾸었다. 나는 새내기였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이름의 자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술잔과 소주병을 같이 들고 와 내게 따르며 그는 싱긋 웃었다.

"한 잔 해, 너 이름 뭐냐?"
"한지윤입니다."

선배라고 생각했다. 거침없는 동작도 그랬고,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위압감도 그랬고. 그 눈빛은 새로운 환경에 불안해하는 새내기의 눈이 아니었다. 왁스를 바른 염색한 머리, 걸고 있는 목걸이, 헐렁한 티셔츠. 너무나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귀에 걸치고 있는 이너폰까지도.

"어이, 원진희, 너 98처럼 굴래? 한지윤, 그 놈 너랑 동기야. 존대할 필요 없다."

어떤 선배가 그렇게 말을 하고서야 난 얼굴을 붉혔다. 얼떨결에 들이킨 소주가 속으로 뜨겁게 퍼져서인지.

그 날의 일은 꿈에서조차 흐릿했다. 나는 취해서 기숙사의 입실 시간을 놓쳤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의 기숙사생들이 학회실에서 웅크리고 선잠을 잤다. 3월 초는 아직 추웠다. 나는 사람들의 온기가 닿을 때마다 흠칫 놀라, 제대로 삼십분도 채 잠을 자지 못했다. 7시 쯤, 사람들이 채 등교하기 전에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기숙사로 달려갔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아서, 기숙사에서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숙취로 쓰린 속을 커피로 뒤집어 놓고, 1교시 수업이 있는 교실로 달려가다가, 원진희를 만났다.

"잘 들어갔냐?"
"...응."

아직 젖은 머리를 의식하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무슨 샴푸 쓰냐?"
"...뭐?"

돌연한 물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연히 물을 것을 물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머리결, 좋다. 기르는 거지? 좋겠네. 나는 돼지털이라서, 그냥 왁스 하는 게 차라리 낫거든."

그가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좋아해, 지윤아."

화득, 꿈에서 깨어난다. 눈이 젖어 있다. 꿈은 거짓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 날 그는 그렇게 말을 던져 놓고는 멀어져갔다. 1교시 수업은 같은 교실이었지만, 대강당 거의 끝자리에 앉은 그를 지나쳐 나는 앞에서 세 번째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동요하는 건, 항상 나였다.
2005/05/10 15:58 2005/05/1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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