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조각
문득 방 안에서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천장 오른쪽 귀퉁이에 동그랗게 빛이 닿아 있었다. 낡은 블라인드를 내린 창의 블라인드 사이, 좁은 사이로 들어온 빛이 천장에 동그랗게 맺혀 있었다. 그 순간 왈칵 눈물이 솟았다. 내가 원하는 건 저런 조그마한 빛이다. 어딘가에는 밝은 무언가가 있다는 작은 희망, 누군가가 바라보지 않아도 틈새로 스며들어와 기다리고 있는 작은 빛.
단절된 공간
문득문득 사무치게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설움의 정체란, 몇십년 전 기억하지도 못하는 유년 시절부터 줄곧 계속된 마음의 상처다. 나이를 먹고 철이 들고 울음을 참는 법을 배우고 타인 앞에서 울지 않는 법을 배우고 나면서 상처는 깊이 깊이 봉인되었어도 불현듯 어느 순간 몇십년의 설움이 저 깊은 곳에서 꼬리를 들곤 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을 얼굴에 그리고 조용히 천천히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어든다. 타인과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는 안도감을 느끼면 수 초도 걸리지 않아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하나의 사건이 아닌 오랫동안 묵어왔던 감정을 한동안 쏟아부어도 깊이 봉인된 말들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아서 나는 다시 공개된 장소로 나온다. 얼굴에 다시 외부를 향한 표정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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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마음 한 쪽이 싸하게 아려왔다. 저 눈, 더럽혀지지 않은, 굽힘없이 빛나던 그 눈, 음악을 이야기하며 생기로 반짝이던 남자의 눈이, 변함없이 곧은 빛을 품고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을 알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입으로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지금 그 얼굴을 떠올리고 마는가.
"…저는…!"
눈과 같은 말을 하려고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젖은 눈에서 물기를 떨어낸다. 울지 않아. 원진희 때문에 울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아선 안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입술을 곱씹으며 말했다.
"이건 내 문제야. 무슨 의도로든 제 3자가 끼어드는 건 사양이야."
다정한 선배의 얼굴을 거두고 차갑게 말을 뱉았다. 가방을 바투 쥐고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떠는 그 얼굴에서 돌아섰다. 학과 사무실에 들르자, 교수님을 뵙자, 그런 일들을 중얼거리며 나는 내 등 뒤를 계속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수업에 다시 복귀해서, 의외로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텍스트는 쌓여 있었고 해야 할 과제도 몇 건인가 있었지만, 오래 자리를 비운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내게 묻는 사람도, 호기심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논문의 결과가 가장 신경쓰이게 마련인 원생들에게 동기가 수업에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교수님의 새 원고가 마무리되었을 즈음에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지윤아."
완성된 원고가 든 메모리 스틱을 받고 나서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현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거 알고 있냐?"
"…네."
뭐라 대답할 지 몰라 한참 후에야 맥없이 대답했다.
"어제, 가위에 눌렸다."
주어가 생략된 말.
"안 돼, 지윤아, 안돼, 라고."
"……."
"…그리곤 울더라. 한참 울다가…, 엄청난 얼굴을 하고는 도로 잠들었다."
"…상태는 어떤가요?"
머뭇거리다 물었다. 교수님은 한참 나를 보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나고 싶은 게 아니냐고, 불러올까 그랬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 그냥 고개만 젓고. 고등학교 때 같아. 고집스럽게 뭔가 생각하는데 말을 안해. 입을 아예 닫은 것 같이."
나는 현진선배의 고등학교 시절을 모른다. 내가 아는 선배는 늘 웃고 있었고, 내 일로 화를 내 주었고, 내 사물함 앞에 포스트잇으로 힘내라고 격려의 말을 남겨놓던 사람이다. 선배가 나를, 세상을 거부하다니. 선배가 말을 닫다니.
선배가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부디 아니길 바라는 거다 이것은. 선배가 그 때 깨어 있지 않았었다고, 선배가 깨어난 건 내게 말을 건넨 그 순간이고-, 그 전에는 어떠한 것도 선배는 몰라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 뿐이다.
"와 주지 않겠냐. 무슨 핑계를 대도 괜찮다. 이 원고라도…."
교수님이 처음으로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를 낫게 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선배가 그렇게 된 건, 밤의 차도에 다시 뛰어든 건 내가 준 열쇠고리 때문이었고-, 지금도 선배가 가위에 눌리는 건 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학과 사무실에 네 우편물이 있던데. 조교가 매번 잊어버렸다고 난처해 했다."
교수님이 말을 돌렸다. 나는 안도한다.
"또 일 생기면 연락하마. 핸드폰 꺼 놓지 마라."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자 조교가 날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김태원은 취직하면서 사직한 전 조교의 빈자리에 6월부터 온 동기생이었다. 학부가 달라서 동기라고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별로 없고, 서로 아직 존대를 쓰는 사이였다. 학부생 몇 명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가 게시판을 훑고 있고, 김태원과 같은 언어학과 출신인 이주형이 소파에 앉아서 전공 서적 몇 권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한참 있어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또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아직 내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지 못하거나.
"우편물이 온 게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을 꺼내자 그제야 아, 하고 벌떡 김태원이 일어났다.
"부피가 꽤 커서, 연락을 한다고 하고 자꾸 잊어버렸네요."
두툼한 소포뭉치였다. 발송자도, 발송 주소도 없이 굵은 글씨로 수취인란에 학교의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나서야 그 글씨가 눈에 익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류처럼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더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네가, 어째서 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피에 비해 가벼운 뭉치가 내 손에 들려서,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으로 밀어닥쳐서.
"논문 준비 시작했어요?"
이주형이 대뜸 내게 물었다.
"아니오, 아직…."
멍하니 대답했다.
"다행이다. 나도 전혀 못해서."
반말도 존대도 아닌 얼버무림으로 이주형이 웃었다.
"태원이 이 자식이 막 압박 줘서. 혼자 놀고 있는 놈 취급을 하고."
"…3학기 때 시작하면 빠듯하다고들 하니까…, 슬슬 시작해야 하긴 하죠."
나는 웃으며 김태원의 편을 들어 주고는 말을 돌렸다.
"그럼 고맙습니다, 내일 수업 때 보죠."
학과실을 나오는데 후끈한 열기가 숨을 파고든다. 여름이다.
허둥대며 지하철을 탔다. 이어폰을 꽂았다. 누군가가 날 불렀던 것 같았지만 모른척 귀를 막았다. 시이나 링고의 스산한 소리가 귀를 채웠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새로운 커피를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그러나 여전히 내 손에는 끊어지지 못한 글씨가 무겁게 낙인뒨 우편물이 있다. 땀을 흘리며 문을 열고는 털썩 대자로 누웠다. 바닥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등이 차가웠다. 거칠게 날 밀어올렸다. 병실의 차갑고 축축하던 공기 속에서 원진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당연히 그에게 안기리라 여겼을까. 더 이상은 싫다, 고 말했는데도.
가위로 소포를 끊었다. 포장 안에 든 건 쇼핑백이었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상표의 구겨진 쇼핑백 안에 잘 개어진 청바지가 들어 있었다. 내 치수였다. 너무 짙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색. 손 끝에 만져지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분명 고가품일 게다. 티셔츠 하나도 싼 것을 입지 않는 그였다. 그저 물쓰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제력을 향유했다. 그가, 내게 이 바지를 보낸 것이다. 원진희, 그가.
그는 모를 것이다. 세상에는 지하철 한 구간의 요금 때문에 오십여분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홈플러스의 이월 상품 할인에 맞춰 판매하는 칠천원짜리 운동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멋부리는 것과 다른 이유로 머리를 기르는 사람, 대학 교재를 산 달에는 학관 식당 국수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시디 한 장에 손이 떨리고 계절이 바뀌면 지난 해의 옷이 아직 맞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온 몸에서 닭살이 도도독 돋았다. 이가 부딪히도록,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도록 계속 계속 찬 물줄기를 맞으며 그냥 나는 그렇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도록,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원진희가 했던 그 눈빛을, 놀라고 상처입은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다 보니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저편에 새하얀 플라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를 집어들다가 으슬 오한이 스친다. 무서웠구나. 뒤늦게 내 감정을 확인하고 하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 욕실로 들어가 아래를 씻고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새로 입었다. 원진희가 보였던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거칠던 손끝의 열기, 아직도 입술에 떠도는 뜨거움.
선배의 옆에 앉았다. 잠든 듯이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 선배를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선배.”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길고 가느다란 선배의 손가락을 감쌌다.
“다시 보지 않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서워서… 무서워서…, 이런 제가….”
띄엄띄엄 서툴게 말이 새어나간다.
“……지윤…아?”
귀를 의심했다. 손끝에서 선배의 손가락이 푸득, 떨었다.
“선배?”
“…너, 왜……, 여기… 있어.”
의문문인지, 아니면 그냥 맺음말로 한 건지. 급하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당직의가 올 것이다. 선배는 눈꺼풀을 무겁고 힘겹게 파들거리다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나를 찾아 시선을 돌리기에 내가 그 끝으로 고개를 가져갔다. 검은 눈이 서서히 초점을 맞출 즈음에 당직의가 도착했다.
나는, 병실에서 쫓겨났다.
귓속에서 차게 앤 아스카가 들렸다. Say Yes, Say Yes.
학교에서 교수님이 달려왔다. 의식만 찾으면 골절이 아무는 것을 기다리는 것만 하면 된다고 그랬다. 검사실로 간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 병실 복도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에 교수님이 선배가 탄 휠체어를 밀고 돌아와 나를 보았다. 퀭하니 핼쓱한 선배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수고했다. 이제 집에 돌아가. 계속 애썼다.”
교수님이 이야기했다. 선배는 나를 스치듯이, 그대로 통과하듯이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빌려준 노트북과 CDP와 음반을 챙기는 동안 나는 완전히 그 공간의 타인이었다. 선배에게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병원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택시를 탈 돈은 없다. 가방끈을 단단히 조이고 나는 걸었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도 없다. 도시는 메마른 형광색의 불빛만을 뱉아낼 뿐, 차가 지나가는 소음과 바람소리만이 공기에 가득 차 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버스 노선을 따라 걸었다.
새벽 공기에 뿌옇게 시선이 밝아졌을 즈음 다리는 나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뻐근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오래 비워둔 집에서는 먼지 냄새가 난다. 버석거리는 이부자리가 부담스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줄기가 다리에 닿으니 오한이 또 일어난다. 벽에 기댔다. 습기 어린 창 너머 뿌연 풍경을 보면서 나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선배의 눈빛, 선배의 태도, …그리고 원진희.
갑자기 저물어 버린 더위처럼 시간은 뻥 뚤려버린 듯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음악이 필요해. 차게 엔 아스카? 아니. 오니츠카 치히로? 아니. 나카시마 미카, 아니, 오페라의 유령, 아니 아니. 무엇이 내 것이었고 무엇이 외부였는지 경계가 허물어져 무너지고 내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조차도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하루를 꼬박 방 안에 웅크려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수많은 꿈이 떠돌았다가 사라졌다. 깨어났을 때는 선배가 다시는 나를 보지 않으려 할 지도 모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넋나간 사람처럼 수업에 다시 나갔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번역을 했다. 아무런 가사도 없는, 칸노 요코의 연주곡들이나 혹은 아주 오래 듣지 않았던 바하의 첼로곡들을 CDP에 넣고 다녔다. 세상과 단절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침묵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땅을 보고 걷는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드물다. 누구나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한다. 조명의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날 보았더라도 쉽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등 뒤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조명과 모노 드라마의 일이 생각난 건 번역의 원고를 교수님께 넘기고 난 다음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하고 있을까, 성실하고 고지식해 보이던 1학년 박현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연까지는 좀 더 넓은 조명의 동아리방을 같이 쓰게 될 거라고 말했던 기억을 더듬어 조명의 문을 두드렸다.
“어 오랜만이다, 지윤이 아냐.”
뭔가 정리중이던 동기가 반갑게 인사했다. 후배들이 꾸벅꾸벅 인사해 오는 것 사이사이로 낮게 내 이름을 귀뜸해주는 소리들도 들린다.
“너 못 본 사이에 더 마른 거 아니냐?” 동기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겠지만.
“딱히 체중관리를 하는 건 아닌데.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아닌걸 뭐. 공연 준비는 잘 돼 가지?”
웃는 얼굴로 물으니 긴장되었던 공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저…, BG 선정한 건데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박현규의 얼굴에 조금은 대학생 티가 배어 있었다. 옅은 담배 냄새가 번진다. 전에는 피지 않는 것 같더니.
“그럼 밖에서 둘이 좀 이야기 해 볼께.”
“그래 그래, 그 녀석 원진희도 갑자기 안 나와서 혼자서 낑낑댔어. 엉망진창이면 막 혼내 줘라.”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서늘해지는 머리를 들킬까봐 급히 동아리방을 나왔다.
대본을 읽는 속도는 빠른 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제대로 읽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각본 녀석도 있었던가. 훑으면서 지나가는 곡명들이 다양하다. 현대적인 분위기에 맞춰진 느낌이었다. 클래식 곡명이 들어와서 보면 뉴에이지 풍의 편곡자 이름이 뒤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뮤지컬 곡이 몇 곡. 감정의 흐름에 꽤 잘 맞춰져 있는 솜씨가 초보자 같지 않다.
“전체적으로 잘 되어 있네.”
녀석이 환히 웃는다.
“그런데 이거, 이건 좀 더 생각해 볼래? 지킬 앤 하이드, 너무 떴잖아. 앵콜 공연에다, 암표까지 돌아서 연극 팬들은 거의 다 최근에 봤을 텐데. 이 곡은 원작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아.”
짧은 대답에 또 얼핏 담배 내음이 풍긴다.
“뮤지컬 곡 쓰는 게 사건별로 어울리는 곡 찾기도 쉽고 그렇긴 한데, 유명한 건 조심하는 게 나아. 연극이 한창인데 아 이거,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이 생기거나 할 수 있거든. 창작곡을 쓸 수 있으면 제일 좋지만 여건이 안 되니.”
“예에,” 주억이는 녀석을 보다가 불현듯 물었다.
“담배 펴?”
“예? 아, 예…, 어, 얼마 전부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면 끊지 그래? 몸에도 안 좋은 걸 뭐하러 일부러 배워.”
무심히 말했다. 녀석이 벌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그만 웃어버린다.
“나한테 죄송할 일이야? 뭐, 그냥 하는 소리야. 하루에 한 갑이면 열흘이면 얼마야? 그 돈이면 CD 한 장을 사겠다, 그게 내 생각이어서. 기호식품인데 누가 뭐라고 할 성질이겠어 그게.”
설명하다보니 구차한 기분이다. 내가 이 녀석을 야단칠 이유가 또 뭐가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 위치도 아닌데다가.
“그런 기분으로 다시 한 번 짜 봐. 어지간하면 분위기는 하나로 통일하는 게 좋은데, 그건 지금도 잘 돼 있네. 강렬하게 강조되는 캐릭터의 상징 음악을 넣어 보는 것도 좋고. 지금도 처음 한 것치곤 잘 돼 있으니까 편한 마음으로.”
끄덕거리는 녀석의 얼굴이 진지하다. 아 그래,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어. 누군가가 열중한 얼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몰두해 있는 얼굴. 내가 그래서 이 녀석을 만나고 싶었던 거구나.
“지윤 선배.”
그림자가 느껴진다 싶더니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최나영. 언제나 밝은 빛을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원진희의 그녀. 나는 태연하려 애쓰면서 그 얼굴을 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이라고 물었던 것 같다. 박현규가 난처하게 일어나 자리를 피해주고 나자 최나영은 확연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동거했던 거에요? 진희 선배랑.”
물음이 아니다, 추궁이다.
“내가 원진희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거 이제 알았어?”
의미를 알면서도 모른 척, 부질없이 화두를 돌려 보려 애쓴다. 소용없을 게 당연한데도.
“깨끗한 척 순수한 척 혼자 다 하더니, 그랬던 거예요? 그러면서 진희 선배가 일본 가니까 재빨리 딴 사람에게 붙은 거네요? 그래놓고 또….”
“현진 선배는 관계 없어.”
말을 잘랐다. 선배는 안된다. 선배는 내개 얽혀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원진희와의 일은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고 내 책임이었지만 현진선배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더러워.”
최나영이 짧게 내뱉었다. 붉은 눈이다. 거꾸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갑작스레 겹쳐지는 환영. 그가 병실에서 내게 했던 것,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마자 욕심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오던 일…, 그리고 그는 최나영을 아마도 그렇게 안았을 터다. 목마르게, 욕심스럽게, 뜨거운 눈으로 최나영의 몸을, 얼굴을, 눈을 핥았을 터다. 오직 그 때만 보여주는, 간절한 눈빛을 했을 터다.
“뭐가?”
차갑게 말이 새어나왔다. 손이 빳빳하게 굳는다.
“너랑 원진희랑 사귀는 거 학교가 다 알거든. 그건 깨끗하고? 네 연애는 아름답고 청결하고, 나는 더러워?”
“틀려요! 나랑 선배랑은…! 어디다 비교하는 거예요!”
“웃기지 마. 나 너한테 무슨 소리 들을 정도로 죄 지은 거 없어. 더러워? 거울이나 보지 그래?”
짧게 말을 자르는데 화끈 뺨이 달아 올랐다. 최나영의 붉은 눈에서 투둑 물기가 흘러 내린다.
“선배가…, 왜 이딴 사람을…!”
돌아섰다. 최나영이 팔을 잡았다. 뿌리치고 노려본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본다. 원진희의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지만 결코 좋아할 수도 없는 그 여자를 본다.
“진희 선배 어디 있어요? 알고 있죠?”
“원진희 못 본지 한 참 됐어.”
재차 돌아선다.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보았겠지. 수근대겠지. 동거라고? 그랬던 거야? 소문이 소문을 낳을 게다. 아아, 다 상관없다. 아무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매었다. 오지 말 걸. 그냥 평소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집에서 무엇을 하면 좋은가. 알고 있었다. 원고를 넘겨 버린 지금 텅 빈 집이 내게 어떨지, 선배의 소식이 오지 않을까 끙끙대면서 있는게 두려워서 나는 여기 오지 않았나.
“…선배….”
등 뒤에 들리는 목소리에 멈추어 섰다.
“괜찮…으세요?”
머뭇거리는 목소리. 현진 선배가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만들지 않을 테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 같은 건, 나를 지탱하는 타인 같은 건 바라지도 만들지도 않을 테다. 그러는 순간, 불쑥 눈 앞을 덩치 큰 그림자가 막아선다.
“정말…이에요? 그…, 원진희 선배…와.”
“…충분히 추궁 당했으니까 너까지 이러지 말아줄래.”
너는 타인이니까. 아직 너는 내 인생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나쁜 사람 이었군요….”
응, 그래. 네 눈에 어떻게 내가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불러도 돼.
“…그러고 저 여…선배한테 가 버리고…, 원진희 선배…나쁜 사람이네요.”
띄엄띄엄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놀라 박현규를 보았다.
“…울지 마세요, 지윤 선배…. 그런 사람 때문에… 울지 마세요.”
그 남자 이야기, 9
병실에 노트북 사용이 되는지를 알아본 후에 교수님은 내게 노트북을 빌려 주셨다. 다른 교수님께 사정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고 간단히 이야기를 전했다. 원고의 마감은 연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거의 병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의식이 없는 동안 주사제만으로 영양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배를 채우러 밖을 나오긴 했지만.
마치 시간이 완전히 멈추어 버린 듯이, 병실 안은 그대로 가을을 향해 접어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공용의 세면장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면 선배는 그저 잠든 듯 계속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언제 의식을 차릴지도 알 수 없었다. 회진을 온 담당의사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고 했지만 나는 종종 선배가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거라는 선고를 받는 악몽에 시달렸다. 잊어버리려는 듯이 번역에 몰두하다가 결국 집에 들러 시디를 몇 장 챙겨 왔다. 정적이 흐르는 1인실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롭게 아름다워서, 음악조차 없으면 나는 그 병실의 안으로 녹아들어가 함께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교수님은 2-3일에 한 번 병실에 들렀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배의 집, 영국과 한국 어느 쪽에도 선배의 사고 소식이 들어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병실에는 교수님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교수님은 항상 조용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 돌아갔다.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돌연 교수님이 물었다. 나는 교수님과 선배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타이핑을 하고 있다가 에, 하고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랄 것도 없는 짧은 탄성이었다.
“사귀는 사람 없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회진은 보통 몇 시에 오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너 알게 된지도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내가 학생들 개인적인 일은 잘 모르는 편이라.”
어느 교수님이든 그건 마찬가지였다.
“원진희인가 하는 녀석처럼 화려하게 소문을 뿌리고 다니면야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지만. 너랑 동기였던가. 너 학교 안에서 딱히 누구랑 친한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교수님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젊은 나이에 지금의 위치에 오른다는 건 운만으로도 실력만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평온한 표정이어도 지금의 눈은 묘하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무엇을 지금 내게서 살피고 있을까, 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
“너랑 현진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네.”
순순히 대답했다. 사귀는 사이였다면 오히려 선뜻 그 집에서 살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가 영국을 간다고 했을 때, 이미 나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명백한 것은 그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두 사람의 출국, 어느 쪽이 나를 뒤흔들었나. 이 무심한 교수님조차 알 만큼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던 그 녀석. 지금도 그 이름만으로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조카가 이 녀석 뿐인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이 녀석이 날 따르더라고. 왜 그런지는 모르지. 교수가 되고 싶어 하나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아니고. 이 녀석 머리는 좋아도 묘하게 차가운 데가 있어서, 사람 상대하는 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차갑…지 않았어요.”
“이 녀석 살갑잖기로 유명한데? 고등학교 때는 더해서, 자기 가르치던 담임이 해고됐는데, 애들 다 운동장에 꿇어앉아 단식하는데 혼자 집에 온 녀석이야.”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선배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동기 하나가, 경멸을 담아 들려주었던 이야기. 나는 금방 잊어버렸다.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실제에다 감정이 더해져서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그런 점이 나는 맘에 드는 거지만. 그래도… 또 다정하기도 한 녀석이니까.”
나는 진심으로 예, 하고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분할 만큼 받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선배는 내게 주었다.
“…젊은 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교수님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너는, 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남자 같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호하다.
“애매한 위치에 있지 마, 많은 사람이 피곤해 진다. 한 사람만의 일이라는 건 원래 없어.”
교수님은 선배의 환자복을 조금 쓰다듬었다.
“아는 친구 하나가, 미혼모인데.”
나는 담담히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좋아했던 게 하필, 유부남인데다, 언니의 남편이라. 그러곤 겁이 없달지, 애까지 낳았지. 그런데 그게 어디 혼자만의 문제가 되나. 그 사람 가정을 깰 생각이 있건 없건, 관계된 사람이 이미 숱한데. 혼자 잘 정리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게 되겠어.”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의 아이를 낳는 일이, 그렇게 항상 일어날 정도로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 사람, 그렇게 술을 마시고. 그러기에 그 사람, 늘 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친구분은, 그럼…?”
“언니라는 사람이 착해 빠져서, 그 아이를 자기 애 삼아서 키웠어. 친구는 그 뒤로도 다른 남자 못 만나고 계속 혼자 살지. 지 자식인데 자식이라는 소리도 못하고. 그게 자기가 책임지는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뭐야. 벌써 몇 사람이나 상처 입히고. 제 한 몸은 편해 졌는지 몰라도.”
나는 교수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교수님의 눈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각도에서는 더더욱 없었다. 아아, 이 사람이 이런 눈을 하고 있었구나. 이런 눈으로 현진 선배를 보는 거구나. 가슴 한쪽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번져나갔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포근한 감각이었다.
“아마… 편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단정하게 묶은 교수님의 머리카락과, 곧은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까이에서 그냥 보고 있는 것, 힘드셨을 거예요. 아예 다른 곳으로 간 것보다 나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한 몸 편한 일은 아닐 것 같아요.”
“…….”
쿡, 교수님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학부생들이 무섭다고 말하는 그 웃음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볼수록, 여성스럽구나.”
교수님의 말 뜻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쁜 의미로 듣지 말고. 좋은 뜻이야. 그게 천부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통 안 되던데.”
“자주 듣는 말인걸요.”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오늘은 다른 후배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과는 다르게, 아프다.
“그럼 나 이만 돌아갈게. 잘 부탁한다.”
교수님이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나는 교수님이 쓰다듬었던 선배의 환자복을 조금 매만졌다.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는 깨어나야만 했다. 아직 선배에겐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내 기준이 아니라 선배의 기준을 듣고 싶었다. 선배는 원래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가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선배가 내게 맞춰왔을 많은 것들이 원래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CDP를 켰다. 이런 날엔 나카시마의 ‘Music’ 음반이 제격이다. 케이스에 꽂혀 있는 시디를 빼서 플레이어에 넣었다. 잠시 첫 곡이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플레이어가 멈추었다. 액정도 꺼졌다. 충전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노트북의 외장 시디롬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받지 못했다. 충전기에 배터리를 넣는다. 오랫동안 나와 같이 한 CDP, 주머니 모서리가 조금 닳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게다. 이 낯선 도시에 올라온 지도.
시디 지갑에서 시디들을 꺼내서 정리했다. 충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차게 엔 아스카의 베스트 앨범. 선배가 눈을 뜨면 틀어 주리라 생각해서 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하철 1호선과, 오니츠카 치히로와,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 브로드웨이 공연의 녹음판이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듯이 화득 놀라 급히 도로 시디 지갑에 챙겨 넣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을까.
그래,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무심히 CDP를 켰을 때 낯선 음악이 나와서 놀랐던 적. 원진희는 나에게 미리 말하지도 않고 CDP 안의 시디를 바꾸어 놓고는 했었다. 참으로 원진희 다운 선택이곤 했었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는, 일본으로 가 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호의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듣던 음악을 나도 듣게 하려는 것. 내가 좋아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녹아내 버리는 원진희가 내게, 자신만의 것을 주고 있는 거라고. …그러고 보면,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나. 그러고 보면, 이제 만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입 밖에 낸 적이 있었나. 혹시라도 원진희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세수를 하려고 병실을 나왔다. 금방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세수를 하려고 얼굴에 물을 갖다 댔을 때, 뭔가 뜨뜻한 것이 흘러 내렸다. 붉은 방울이 점점이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피. 선배는 얼마나 피를 흘렸을까. 그에 비하면, 검은 아스팔트에 뜨겁게 번졌을 선배의 선혈을 생각하면, 이런 것이야.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한참 보고 있는데, 들어오던 간호사가 깜짝 놀란다. 무슨 말을 하면서 나를 끄는지 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뭔가 처치를 하고, 걱정스럽게 뭔가 말을 하고, 그 모든 것이 남의 일인 듯이. 한 시간 가량을 붙들고 있더니 가제도 도로 떼어 내고 가도 좋다고 한다. 그 말만이 겨우 들려서 슥슥 추슬러 병실로 돌아온다.
문을 열었다.
원진희가, 있었다. 나는 뭔가 말했다. 무어라 말하나, 내 목소리가 무슨 말을 만드나.
“궁금해서.”
평소같지 않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아, 소리다. 처음으로 선명하게 생명을 갖고 소리가 귀 안으로 들어온다. 차가운 손이 내 뺨을 만졌다. 흠칫 물러나서, 그를 보았다. 굳은 얼굴. 어째서. 어째서 그런 눈으로, 알 리 없는 이 곳에 그가 있는가.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쥐었다.
그가 저런 눈으로 날 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단 한번도 그는, 저런 눈으로 날 보지 않았다.
화내고 있는 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이나영이 재회 이후 다시 공식 커플처럼 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나는, 그런 거라고?
따뜻하게 귓불에 키스한다. 차가운 손이 어깨를 쥐고 있더니, 그는 내 얼굴을 음미하듯이, 어루만지듯이 키스하고 내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쓰다듬는다. 조심스럽게 그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는다.
“원진희!”
그가, 가슴을 더듬으며 나를 감쌌다. 그를 밀어낸다. 아니, 안 돼. 이제 더 이상은 싫다고. 더 이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나는…, 나는….
그는 물러나는 대신 허리띠 버클을 끌렀다. 소스라치게 놀라 뿌리친다. 철썩, 그의 뺨이 붉었다. 아아, 때리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물러났다. 돌아가, 돌아가. 제발, 나를 무너지게 하지 마. 너에게 더 이상 나를 휘말리게 하지 마.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옷을 끌어올리고, 끌어내렸다. 서늘하다. 병실은 춥지 않은 온도인데도, 살갗에 닿는 그의 손가락이 차갑다. 몇 번이고 밀어내고 버둥거려도 그가 나보다 힘이 세다. 그가 젖은 입술로 내 가슴에 입맞추고, 내 다리를 적셨다. 뚜욱, 하고, 다른 것이 떨어졌다.
그가, 울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이 열중해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이렇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데. 어째서.
그는 한참만에 몸을 떼었다.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다시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다. 다만 그 붉은 눈을 하고 일어나서,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병실 문이 닫혔다. 벽에 등을 기댔다. 드러난 등으로 차가운 병실 벽이 닿는다.
그렇게 차가운 손을 하고서, 그렇게 아픈 눈을 하고서, 날 보고 어쩌라는 거야.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줘.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는 ....
응, 원진희. 날, 사랑해?
쇠고기말이밥, 김치를 넣은 청국장, 손으로 만 김치김밥, 오이지무침, 더덕 고추장 구이. 그리운 것은 항상 생생하면서도 아득하니 멀다. 처음 산 LP판을 개봉할 때의 옅은 냄새, 레코드판이 휘어졌을 떄의 당혹감, 늘어난 테이프의 뒤틀린 음색을 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 같은 것이 그런 느낌과 닮았을까. 나는 머리카락을 말리려 켜놓은 선풍기 바람 앞에서 문득 내가 어렸을 떄부터 시간 속에 버리고, 혹은 잊어버리고 온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길고 복잡한 터널 속에 남겨둔 것들은 다시 거슬러 되돌아가 찾을 수 없기 때문인지, 그만큼 더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지곤 하는 것이다.
0.
그 사람을 말하자고 마음 먹으면 항상 생각나는 것이 그 사람의 짧게 자른 앞머리라든가 조금 내려온 안경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그 사람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주던 Happy birthday 노래라든가 그가 내게 선물한 크리스탈 열쇠고리 같은 것들은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렇구나 하고 떠올리게 되곤 하는 겁니다. 햇빛에 비춰지면 반짝거리며 태양의 잔해인 듯이 빛나던 새 모양의 열쇠고리. 나는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된 사실을 그 열쇠고리 앞에서 중얼거립니다. 미안해요, 오빠. 사실 나, 새 포비아가 있어. 승오 오빠는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열쇠고리를 받았던 그 순간의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1.
인영이는 선이 가는 여자애였다. 잘 빗어내린 직모의 단발머리와 목섶까지 채운 티셔츠의 목선, 할랑하게 입은 트윌 면바지. 인영이는 내가 남겨 두고 온 80년대의 느낌을 갖고 있었다. 나는 이따금 인영이 풀을 먹인 새하얀 칼라에 진감색 재킷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실제 그 교복이야 80년대 초반에 이미 사라졌고 인영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도 미국 아이비리그의 교복을 닮은 체크무늬 넥타이의 블레이져를 입었었다. 나와 인영은 이웃 학교를 다녔다.
인영이가 내게 항상 과거의 편린처럼 느껴졌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면 인영이 내게 입을 달싹이면서도 속으로 삼켰던 말들이 인영을 과거의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는 생각을 한다.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인영에게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최루탄 연기 자욱한 대학 캠퍼스가 드문 일이었다. 시대에 짓눌린다는 것은 민주화라든지 자유라든지 하는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아이들 과외자리를 잘리지 않을까라든가 내년 학비가 얼마나 오를까라는 주제가 더 중요했다.
인영은 휠라 백팩을 매고 늘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었다. 일주일 중 4일을 과외 아르바이트로 보냈고 주일이면 교회에 갔다. 포켓볼, 재즈댄스, 배낭여행, 90년대 대학에 번져있던 모든 것에서 비켜서서, 인영은 그렇게 있었다. 그 흔한 동아리활동과도 무관한 대학 중앙도서관 3층 열람실 구석자리에서 인영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다.
0.
그랬네요. 나는 그를, 승오 오빠를 만났을 때 스물 세 살이었습니다. 오빠는 군대를 제대하고 4학년으로 복학한, 이상한 사람이었죠. 26개월의 군복무가 아닌 18개월간의 방위 근무 동안 승오 오빠는 자신의 입학동기들과 자주 연락을 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원래 선배들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못 돼요. 하나씩 빠져나가는 남자 동기들의 이름도 내게는 전화번호부에서 넘쳐나는 누군가의 이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내가 2학년 때 군대에 갔다는 선배 이름을, 그 얼굴을 알고 있을 리가 없지요. 그는 그런데도 내가 당연히 자신의 이름을 알아야 하는 듯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삐삐 번호를 건넸습니다. 당연히 내가 내 번호를 알려 줄 거라 생각한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작년 과 회지에도 실려 있는데 굳이 알려줄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요. 그는 화가 난 듯 보였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와 참 많은 수업이 겹쳐지더군요. 나는 우리 과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체육과나 경영학과의 과목들을 듣지 않고 사회학과나 심리학과의 수업을 즐겨 들었습니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아요. 성의 사회학이니, 구조주의 심리학이니 하는 것들. 자유선택과목으로 다른 전공을 듣는 학생 중에 수학과 학생은 처음이란 말이 내게는 그리 새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오고 나니 그도 그렇더군요. 그는 항상 교실 뒷자리에 앉는 나와는 달리 앞에 앉아, 이따금 졸다 교수님께 혼나는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노트 한 번 내게 빌리지 않았던.
그 남자 이야기, 7
“지윤아.”
선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한다. 선배도 결혼을 하고 떠나간다. 내 곁에 남아 있지 않는다. 선배가…
“나랑, 같이 살래?”
손을 내밀었다. 선배의 말은 원진희의 것과는 다르다. 선배는 원진희가 그런 식으로 나에게 대한 것에 화내 준 사람이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그 말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그러니까 선배의 지금 이 말은, 내가 오해했던 그 때의 표현이었다. 원진희가 내게 했던 말. ‘여기서 살아’,에서 내가 떠올렸던 그 벅찬 기대감.
…하지만.
네, 라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역시… 안 되겠지?”
웃으며 선배가 말을 돌렸다.
“…죄송해요 선배.”
선배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나는 놀라지 않는다. 선배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흩어 놓는다. 가늘고 긴 선배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이 느껴진다. 선배는 웃고 있다. 젖은 눈으로 웃고 있다.
“줄곧 널 좋아했어.”
“…선…,”
“그냥 듣고 있어 줄래?”
말을 멈추었다. 선배는 여전히 웃고 있다.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어. 2학년 때, 듣기 싫어서 미적거리다가 1학년들 잔뜩 있는 곳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거기서 널 봤지. 눈 한번 교수님한테서 떼지도 않고 열심히 필기를 하는 얼굴이 눈에 익었어. 우리 과 애다 싶었지. 그러더니…, 수업이 마치니까 곧장 귀에 이어폰을 꽂고는 나가더라. 단정하게 백팩을 양쪽 어깨에 메고는, 뒤 한 번 안 돌아보고 전공교실로 가더라.”
선배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물어 보니까 원진희랑 같이 산대. 지방에서 올라와서, 부잣집 도련님이 방 한 칸을 내어 준 거라고들 했지. 나는 그 녀석이 싫었어. 네가…, 결석하거나 늦게 지친 얼굴로 오는 날이면, 항상 그 녀석은 평소보다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나…, 네가 말하기 전에 반쯤은 짐작하고 있었어.”
선배는 나와 닮은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돌리면 거의 선배가 있었다. 비슷한 장소에서 비슷한 행동을 하면서 선배는,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깐깐하다고들 해도 나에게만큼은 자상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선배를 오해한다고 생각했다. 선배가 내가 듣는 가수를 알고 여행길에 내게 시디를 선물했을 때에도, 유독 닮은꼴인 내가 생각났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다.
원진희를 탓할 자격은 없다. 선배는, 그 오랜 시간동안을 날 보고 있었다는 거다. 영국으로 가면서도 이 집을 내게 빌려준 건, 선배 나름의 사슬 아니었을까. 나는 왜 그걸 전혀 눈치도 채지 못하고.
“좋은 선배로 따라 주어서 그걸로도 좋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그 마음은 그대로고. 그러니까 부담스러워하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선배는 웃고 있다.
“그래도 명확하게 해 놓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고 생각해서 말한 거니까. 만약 부담스럽다면 잊어버려 주면 좋겠고.”
“…선배 저….”
“자, 이걸로 끝.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선배는 일어나서 자기 접시를 씻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천천히 정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호흡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접시에 놓인 만두를 먹었다. 만두는 따뜻했다. 이 더운 날씨에 입 안에 들어가는 만두는 뜨겁지 않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입 안에서 만두 속이 부드럽게 씹혔다. 나는 남김없이 만두를 먹고 일어나 설거지를 했다. 선배 방 손잡이를 잡아 보았다. 묵직하게 잠긴 것이 느껴졌다. 똑 똑 두 번 노크를 해 보았지만 선배는 대답하지 않았다.
뒤척이다가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선배는 보이지 않았다. 선배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이 아침마다 선배가 나간 뒤에 일어나곤 했지만, 오늘은 겨우 5시였다. 작은방 문을 열어 보았더니 스르륵 열렸다. 방 안은 비어 있었다. 이불이 개어져 올려진 건 언제나의 아침과 같았지만 오늘은, 선배가 들고 온 노트북도 선배의 수트케이스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선배가 오면서 가지고 온 물건이 모두 사라져 있는 것이다.
…돌아갔구나.
한국에는 선배 아버지의 집도 있었다. 선배는 거기로 갔을까. 아닐 것이다. 선배는 평소에도 아버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입을 열어 들려주는 가족의 이야기는 주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선배가 혹시 돌아올지 몰라서 이불을 도로 내려놓았다.
선배가 만들어 놓은 스크램블 에그가 없는 아침이었다. 토스트에 버터만 발라서 한 쪽을 먹고 앉았다. 이걸로 끝, 이라니, 예전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니. 선배도 그게 불가능한 걸 알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거라면 선배는 이렇게 떠나지 않아도 되는데. 냉장고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지도 않고 이렇게 가 버리다니.
갑자기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내가 이 곳에 있어도 되는 것인지. 선배가 영국에서 돌아올 때까지 이 집을 관리하는 게 선배가 내게 부탁한 거였다. 그럼 선배는 처음 계획대로 돌아오는 걸까. 아니면 영국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리를 잡는 걸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어떻게도 움직일 수 없었다.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왔다. 나는 여전히 백 팩을 양쪽 어깨에 맨다. 가방이 무거운 것도 있지만, 한쪽 어깨로 매는 것이 영 익숙하지 않았다. 고등학생이냐고 놀리던 동기들도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되어 버렸다. 그걸 좋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내 뒷모습을 봐 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따뜻하고 행복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건 애정과는 다른 무언가, 마음을 받는 것이 아무리 기쁘더라도- 그 답을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거였겠지, 원진희도. 설사 내가 줄곧 보고 있다는 걸,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어도, 그게 기뻤더라도, 응해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러니까….
가슴이 지끈 아렸다. 문을 잠그고 건물을 나왔다.
학교에 와서 들르는 곳은 항상 교수님의 방 정도였다. 수업이 있는 시간에 거의 맞추어 강의실로 가고 나머지 시간은 교수님 연구실에 딸려 있는 방에서 머물렀다. 원래는 교수님 방을 통해서도 갈 수 있고 복도 쪽의 문을 통해서도 갈 수 있지만 대개는 캐비넷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두 방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문을 한쪽으로 해 두는 편이 보안상 좋다는 이유였다.
조명에서 원진희를 만난 이후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교수동에서 보냈다. 교수님은 집중할 때에는 주변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하셨다. 다른 방에서 나는 조교에게 지급되는 컴퓨터로 메모리 스틱을 꽂아 번역을 하고 있었다. 교수님 방에서 옆방으로 가는 문은 닫아 두고 있어서 혹시라도 손님이 들어오더라도 내가 작업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킬 염려는 없었다. 옆방에 있었지만 교수님과는 별로 이야기할 일도 없었다. 수업이 있을 때만 잠시 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교수님은 내가 갑자기 조교실에 틀어박혀 있는 것에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보통 여덟시 반 정도에 교수님은 출근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늘은 아홉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교수님은 오지 않았다. 오늘은 1교시가 없는 날이긴 했지만 교수님은 항상 같은 시간에 출근하시곤 했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슬슬 들기 시작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한지윤입니다,”
“내 방이냐?”
수화기 너머에서 교수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교수님 오늘 2교시 수업 있으신데요….”
“알아, 과 조교한테 연락해서 오늘 결강이란 이야기 좀 해 줘. 지금 병원인데, 일찍 들어가도 4교시나 되어야 갈 것 같다.”
병원, 이라는 말에 갑자기 심장이 쿵쾅, 소리 나게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도 여기로 좀 와 주면 좋겠다. 연대 세브란스 응급실인데, 곧 외과병동으로 옮길 거야. 외과병동에서 현진이 이름 대고 들어와.”
“…현진선배요?”
“그래. 현진이 지금 여기 있어. 새벽에 교통사고 나서. 학과 일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와라.”
교수님은 뭔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가 마는 듯이 전화를 뚝, 끊었다.
넋이 나간 듯이 영문과 학과실에 가서 교수님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나는 정신없이 택시에 탔다. 세브란스 병원은 신촌 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게 떠올랐던 것이다. 택시에 오르고 나서야 방에 원고를 그대로 펴놓고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되돌아갈 생각은 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 하루 그 방은 잠긴 채일 테니까.
일반외과 병동에서 현진선배의 이름을 댔을 때, 막 교수님과 마주쳤다. 교수님은 집에서 입는 옷차림 그대로인 듯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는 손짓했다. 1인실의 새하얀 병실에 선배가 누워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한 쪽 다리와 한 쪽 손에 깁스를 한 채로 퉁퉁 부은 얼굴이 선배라는 걸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수트케이스 들고 새벽에 횡단보도를 건넜단다. 목격자가 있어서 다행이었는데…, 파란불에서 다 건넜는데 뭔가 주우러 다시 횡단보도로 돌아갔다더라. 깜빡거릴 때 지나가던 트럭에 받혔어.”
교수님은 나에게 전화했을 때보다는 훨씬 진정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을 만큼 선배는 만신창이였다. 옆에 놓여 있는 수트케이스도 찌그러지고 긁혀서 원래 내가 알던 그 물건 같지 않았다. 꼼꼼하고 철저한 선배가 도로 횡단보도로 돌아갔다니. 달려오고 있는 차도 보지 못했었다니.
“손에 저거 쥐고 있었어. 뼈 나간 거 맞추고 하느라 빼냈는데 놓지 않으려고 해서 애먹었대더라.”
교수님이 탁자 위를 가리켰다. 은으로 만든 열쇠고리. L.H.J.
“그래서 널 불렀다.”
교수님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선배가 이야기했을까.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저 열쇠고리를 누가 주었는지. 선배의 출국일에 맞춰서 급히 들고 갔던 열쇠 고리 끝에는 처음 그게 주인을 찾아 갈 때처럼 오피스텔의 열쇠가 꽂혀 있었다. 뭐 대단한 거라고, 저런 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다시 돌아와서.
“지갑에 내 명함이 들어 있어서 병원에서 나한테 연락했다. 저 녀석, 그 흔한 핸드폰도 없지 않냐. 다른 친척들 들으면 까무러칠 일이라 친척들에게는 연락 안했고. 이 녀석 지 애비 만나고 싶어할 것 같지도 않았고.”
교수님이 담담히 말했다.
“현진이 곁에 좀 있어주지 않겠냐.”
“교수님 저는….”
뭔가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나. 선배와 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에요, 라고 말할 수 없었다. 피붙이보다도 더 믿었던 사람이었다. 내게는 식구들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교수님이 상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 지금 나는 선배 곁에 있고 싶었다. 선배가 깨어났을 때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었다.
“…제가, 있을 게요.”
며칠간 선배는 거의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오랜만의 귀국이니 만날 사람도 많을 테고, 친지들과도 일이 있을 거다. 하지만 혹시나 선배가 일찍 들어오지 않을까 해서 만들어 둔 저녁밥을 다음 날 아침에 그대로 보게 되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해지곤 했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선배가 매일 아침 챙겨 놓는 아침이었다. 선배는 내가 일찍 일어난 날에도 항상 먼저 나가고 없었다. 더운 여름에 부드러운 스크램블은 좀 식어 있어도 상관없었지만, 냉장고에 바꾸어 붙여두는 메모에는 한 번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즈음에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날 밤에 내가 선배를 상처 입힌 게 아니었을까. 내가 의식하지 못한 무언가로 선배가 화가 난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내가 사람을 대하는 데 서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리 지르며 내 목을 조르던 그 남자 외에도 내가 지금껏 사는 동안에 나를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이 없었던가. 처음 그 남자의 죽음을 목격했던 그 날의 ‘그 여자’, 그리고 등 뒤에 서 있었던 ‘그 애’ 지훈이, 술이 취해 붉은 눈으로 내 몸을 훑는 그 사람, 그들의 눈에 종종 덜함 없는 살의가 맺히곤 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잊지 못한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꼬박 컴퓨터 앞에서 보냈다. 은색 메모리 스틱. 내 하드디스크에는 이 글의 자료가 남아 있어서는 아노딘다. 나는 항상 이 스틱에만 작업을 했다. 음악을 크게 틀었다. 나카시마 미카도 오니츠카 치히로도 아닌, 생뚱맞게도 차게 & 아스카를 종일 틀어 놓았다. 가끔 안전지대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음반을 오랜만에 꺼내 틀기도 했다.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무던한 목소리들이 그대로 귓전을 흐르도록 내버려 두었다. 정말로 견딜 수 없어지면, 미샤 마이스키를 걸었다.
원진희와 함께 조수미 콘서트를 보러 갔었다. 재능으로 뭉친 여인이 너무나 눈이 부셔서 나는 울었다. 앵콜무대의 재기발랄함에도 웃지 못했다. 내가 앉은 좌석은, 내가 교수님께 매월 받는 돈의 1/2, 반 달 치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그는 내게 귀찮은 것이라도 되는 듯 티켓을 내밀고는, 나란히 앉아서 공연 내내 조금도 변함없는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너무 평범한 선곡이야.
원진희가 짧게 중얼거렸다. 대중적이라고, 누구나 알 만한 알려진 곡에, ‘명태’까지 포함된 선곡이 그는 싫었던 모양이다. 사인을 받으려 줄선 이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집으로 돌아와 몇 년 전에 발매된 조수미의 음반을 시디 플레이어에 걸었다. 그 때 나는 부끄러웠던 것 같다. 처음 앉아 보는 클래식 공연장의 최고 좌석에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해했던 내 맘을 원진희에게 들킬까봐 두려워했다.
미샤는, 원진희가 없던 겨울에 만났다. 몹시 앓았던 십이월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콘서트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곱슬머리의 남자의 웃음 띈 얼굴에 홀린 듯 버스를 타고 예술의 전당으로 가서, 30분남은 공연의 현장티켓을 구입해 들어갔다. 스웨터에 청바지, 백 팩 차림.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들어간 공연장 구석자리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미샤를 보았다. 긴 곱슬머리, 그는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열에 들뜬 몸으로 나는 처음 본 미샤에게 반했고, 두 시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버스카드에 돈이 하나도 없어서였다. 그 날, 텅 빈 오피스텔에서 열로 앓으면서 나는 애꿎게도 더위에 지친 나를 식혀주던 원진희를 생각했다. 안긴 후 지쳐 늘어진 나를 안고 욕실에 들어가 찬 물을 틀어 주던 원진희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떠난 날 아침 짐을 꾸려 오피스텔을 나왔던 것을, 그가 한 번도 내게 연락하지 않았던 것을 곱씹었다.
십이월의 한가운데, 크리스마스를 10일 앞둔 그 날에 앓고 일어나서 마음먹었다. 처음 서울로 왔을 때처럼 다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살겠다고. 커피 생두를 냉장고에 봉인하고, 대학원 시험의 합격 소식을 들었다.
“지윤이 있구나?”
선배의 목소리였다. 놀라 일어났다. 손에는 비닐봉지 위로 시장을 본 듯 부추 단이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한국 들어와도 왜 이리 바쁘다니. 집에서 너 볼 날이 없네.”
웃는 얼굴이, 안심이 되어서.
“웬 부추여요? 전 부치시게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고.
“응? 아니, 만두 먹고 싶어서. 친척집에서 김치도 받아왔어. 시큼한 게 만두 하기 좋을 거야.”
“안 더우세요?”
내가 전전긍긍했던 것, 선배가 다치지 않았을지 염려했던 것을 억지로 묻고, 웃음 짓는다.
“이열치열이라잖니. 남는 거야 냉동실에 넣으면 되고, 아 그리고.”
선배는 웃으며 백팩에서 작은 캔 하나를 꺼냈다. 진녹색의 작은 캔, 정육면체에 가까운 직육면체, 고딕체의 화려한 글씨로 ‘포트넘 엔 메이슨’이라고 쓰여진. 뒤늦게 그 의미를 알고 왈칵, 울음이 솟구치는 것을 참았다. 다질링. 내가 유일하게 마실 수 있는 홍차 캔. 선배가 좋아하는 건 앗삼이었다. 그리고 선배는, 옅은 다질링 보다는 짙은 앗삼이나 케냐로 밀크티를 끓여, 얇게 썬 아몬드 슬라이스를 띄워 먹는 것을 좋아했다. 선배와 함께 갔었던 대학로의 ‘차야’에서 선배가 당황했던 걸 기억한다. 진한 홍차도 우유도 버거워하는 나에게 선배는 퀸 앤 대신 다질링을 새로 시켜 주었다.
“기왕 이열치열이니까, 에어컨 빵빵하게 틀고 뜨겁게 다질링 마시자.”
“선배는 앗삼 좋아하시잖아요.”
“백화점에 작은 캔으로 앗삼이 없대. 그리고 앗삼 슈퍼브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데, 그건 작은 캔으로 아예 나오지도 않잖니.”
속 보이는 거짓말. 선배의 눈이 흔들려서 나는 그냥 애써 웃는다. 커다란 플라스틱 통에 두부를 으깨고, 부추를 총총 썰어 넣고, 다진 고기를 볶아서 넣고, 김치도 총총 썰어 물기를 짠다. 선배의 손이 빠르게 칼질을 하고 나는 베로 물기를 짜낸 재료들을 섞었다. 선배보다 내가 손이 크다. 재료는 점점 더해지고 나는 계속 잘 섞는다.
“결혼식은 언제에요?”
“응, 어제.”
태연하게 선배가 앉은뱅이 상 위에 물 대접과 만두피를 놓으며 말했다.
“며칠만 더 신세질께. 모처럼 왔더니 보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
“신세라뇨…, 제가 오히려…!”
“또 정색한다, 우리 지윤이.”
웃음.
선배는 시범을 보이듯이 갸름하게 만두를 빚고는 양 끝을 붙여 동그란 모자처럼 만든다. 선배가 ‘조명’에 몇 번인가 만두를 쪄 왔던 것을 떠올린다. 선배를 닮아 작고 둥글던 만두 속에는 가끔은 잡채가, 가끔은 김치가, 또 가끔은 불고기가 담뿍 들어 있었다. 선배는 영문과가 아니라 식영과를 가야 했던 게 아니냐고, 그나마 편하게 지내던 후배들이 놀림을 섞어 말하면, 언젠가 세계 제일의 요리사가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의 음성이니까 황송해 하도록! 깐깐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좋아하는 게 한 가지는 있다. 설사 그게 그 사람의 일상적인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손도 큰데 만두 참 잘 빚는다.”
선배가 웃으며 내 만두를 가리켰다.
“송편도 잘 빚겠다. 어머님이 좋아하셨겠네.”
“아뇨, 저희는 별로…, 송편 안 빚어서요. 만두도….”
말을 흐린다. 지끈, 무언가가 우는 소리. 명절이면 더 눈물짓던 그 여자. 내 목을 졸랐던 그 남자가 좋아했던 가래떡은 끝내 식탁 위에서 사라졌다. 무슨 연상 작용이었는지 송편도, 만두도, 사라졌다. 그리고는 명절이면 그렇게 세상이 무너질 듯 흐느꼈다. 지훈이, 그 여자의 희망, 그 여자가 사랑하고, 그 여자를 사랑한 유일한 아들은 그 날에도 소리를 질렀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면-. 그런데도 그들은 왜 행복해지지 못했을까. 새하얀 국화를 들고 왔던 유순해 보이던 그 남자와 새로 만들어 낸 가정조차도, 그렇게 위태롭게 무너지기 직전의 모습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왜 그 여자는 여전히 울면서 내게 전화를 거는가. 지훈이의 말 대로라면, 술에 취해 흐느끼는 그 여자의 말대로라면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의무도 없는 거다. 붉은 눈에 혀가 꼬이던 그 남자가 나를 그렇게나 혐오할 이유도 없는 거다. 그런데도 그들은 잘못 씌어져 있다는 서류를 정정할 생각도 하지 않고, 내게 이해할 수 없는 의무를 주장한다.
“진희는 요즘 안 만나니?”
지나가는 말처럼 선배가 묻는다. 나는 도리질한다. 만나지 않을 거예요. 더 이상 원진희가 내 삶을 휘두르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 애가 오지 않는 방에서 쓸쓸해 하는 것이나, 한없이 그 애 취향에 맞추는 것이나, 내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애에게 어울려 들어가는 것, 모두 힘이 드니까. 사랑이란 이름은 일방적으로 되는 게 아니고, 손은 혼자서 잡을 수 없는 거니까. 1학년 2학기부터 지금까지 4년간 휘둘린 시간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처음처럼 홀로 서고.
“난 그 녀석, 싫어했어. 처음 신입생 환영회때부터, 이상할만큼 거슬렸지.”
그만큼 튀었으니까요, 선배들이 좋아할 인상은 아니었어요. 저도 알아요.
“넌 그 녀석의 뭐가 좋았니?”
“…잘 모르겠어요. 지금 와서는. 아마…, 거침없고, 오만한 것 같은 눈빛이나, 모든 게, 당연한 듯이 누리는 그런 뻔뻔함…, 그런 게 좋았던 걸까.”
“이거 두 번째 묻는 건데, 지윤아, 너 지난번과 대답이 다르네.”
“…예?”
되묻는 내 눈에 선배의 숙인 눈꺼풀이 들어온다.
“아냐, 이 쪽이 좋아. 지난번에는…, 울었거든, 너.”
선배는 소반에 가득한 만두를 찜 틀에 베를 깔고 올린다. 나는 숨이 막혀 잠시 숨을 쉬지 못하다가, 선배가 돌아와서야 하아, 겨우 내뱉었다. 잊고 있었던, 그가 떠난 날의 일이다. 잊어버리려고 했고, 잊어버렸던.
- 너 그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으냐?
- ……몰라요.
겨우 말을 뱉고 나는 도망치듯이 돌아서서 올라갔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계속 걷고 걸어가다 돌아서니 선배가 있었다.
- 지윤아…, 너…, 진희와…….
뒷말을 듣지 않고 나는 무너졌다. 선배, 어떻게 해요. 간대요, 원진희가 일본에 간대요. 떠남을 준비했던 건 나였는데도, 그가 떠나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게 말 한 마디 없이, 날 떠날 준비를 했던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더 견딜 수 없던 건, 내가 그를, 여전히, 그리워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건 이제 얼려 놓아야겠다. 냉동실 여유 있지?”
“예. 별로 쓰지 않으니까요.”
그나마 들어있었던 생두도 내놓았고. 선배가 나를 현실로 되돌려 놓지 않았더라면 나는 1년 전 시간에 게속 머물러 있을 뻔 했다. 덕분에 선배와 같이 냉장고 속으로 남은 만두를 모두 집어넣고, 마침 한소큼 끓어 오른 찜통을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쿡 낮게 웃었다. 선배와 알고 지낸 시간은 길었지만 선배와 함께 이 집에서 한 것은 이삿짐을 싼 것 외에는 없었다. 가끔 내가 선배에게 커피를 내려 주긴 했어도, 선배가 가끔 보온병에 든 다질링을 내게 건네긴 했어도. 두 사람이 함께 무언가 한 것은 지금 함께 만두를 만든 것이 처음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나는 초간장을 만들었고 선배는 야채를 오리엔탈 드레싱으로 무쳤다. 함께 저녁을 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고, 선배가 끓인 따뜻한 홍차를 마시면서 나는 정말로 완전히 원진희를 잊고 있었다. 선배는 흥얼거리며 차게&아스카의 On Your Mark에 맞춰 발을 굴렀다. 나는 컴퓨터에 꽂힌 은색 스틱이 더 이상 짐스럽지 않았다. 선배의 그 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더없이 행복했다.
“부모님, 이혼하실 것 같아.”
“……예?”
어이없는 반문.
“아버지한테 새 여자가 생겼대. 한국에 남는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불안해했던 게 적중한 거지. 어머니한테 이혼해 달라고. 어머니는, 명쾌하게 도장 찍어 주겠다고 하고.”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웃으면서, 담담히 선배가 말했다.
“어머니는 그냥 거기 계실 거라고, 수속 밟으시는 중. 한국 땅에 정떨어졌다고.”
그럼 선배는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어머니의 교환교수 건으로 나간 거였다. 2년 반, 한시적인 유예였다. 나는 선배가 돌아와 대학원에 가거나, 혹은 선배가 좋아하는 요리를 시작하거나 할 거라고, 늘 그렇게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 모든 당연했던 것들은 실상 하나도 확실하지 않은 가정에 불과했다. 선배가 그 곳에 계속 머물 확률, 외가가 있다는 그 나라에 완전히 뿌리내릴 가능성도 그만큼 있었다. 교수님이 졸업한 학교, 교수님이 섰던 강단, 나와는 별로 상관 없던 것들이 돌연 무게감을 재고 중요한 것이 되었을 때, 노래가 바뀌었다. Say Goodbye.
“나는, 어쨌으면 좋겠어?”
선배가 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어째서 내게 물어요. 어째서 내가 그 일을 결정할 수 있는 듯이, 내가 선배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믿게 만들어요. 그렇게 보지 말아요. 그런 눈동자로 보지 마세요. 선배는 늘 웃고 있었잖아요. 변함없이 그 곳에 서 있는 마을 입구의 오랜 나무 마냥, 늘 그렇게.
“그 나라에서 일을 가지고, 그 나라에서 결혼을 하고,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언어 문제는, 뭐 괜찮을 거야. 공부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명색이 영문과 졸업생이니까.”
“선배가 왜 공부를 못해요, 교수님들이 선배 얼마나 좋아하셨는데요.”
의미 없이 반박한다. 해야 할 대답 대신에 말을 돌린다. 무거워요. 나한테 그런 거, 묻지 마.
“뭐 일단은, 처음 계획대로는 거기 있을 거야. 요리 스쿨 다니거든? 한국 오느라 쉰다고 말하고 왔지만. 정식으로 중국요리 자격증 따고 올 생각이었고. 영국에서 중국 요리 자격증이라니 좀 웃긴가? 어쨌든 좀 더 생각해 봐야지 뭐. 오더라도 아버지 하고는 안 볼 테니까 서두를 필요도 없고.”
선배도 중언부언 말을 맺었다. 나는 안도한다.
“…주착이라니까, 아버지 말야. 새 여자, 이제 겨우 서른이래. 웃겨. 딸 뻘 되는 여자랑, 뭐 하는 건지.”
남의 추문을 이야기하듯이 웃음을 섞어 말하고는 선배는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짓눌린 내 표정을 읽은 듯이.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또 나 보시고 뭐라시는 줄 알아? 네가 결혼을 아직 안한 게 제일 마음에 걸려. 현진아, 맘에 두고 있는 상대 있으면 미루지 말고 보여 줘, 래. 당신 결혼이 그렇게 어이없이 파토가 났는데, 거기서 자식을 어서 결혼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드는 건지.”
선배의 말을 그저 듣고 있었다. 그렇구나. 현진 선배의 부모님, 선배의 지갑 속에 들어 있었던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서로 마주보고 있던 그 두 분이, 헤어지는구나. 세상의 모든 결혼은 그렇게 무너지는 것인가. 나는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이없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선배 역시도 결혼을 할 수 있고, 누군가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어째서 그렇게나 현실성이 없는 일처럼 느껴졌었던 것인지.
박현규는 곡 하나를 다 듣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 쑥쑥해하며 일어났다. 나도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가 학년으로 돌아가며 연신 돌아서는 것은 나는 한참 보다가, ‘모노드라마’의 동아리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원진희의 잔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익숙해질 것이다. 그가 없는 1년 동안 나는 생두를 밀봉한 채 열지 않았고, 오니치카 치히로의 음반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전에는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내 취미들이 봉인되어도 나는 살아 있었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이 뭐가 있는가. 그가 내 입술을 열고 옷자락을 파고 드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그가 고백하는 꿈도, 그와 함께 먼 나라를 여행하는 꿈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그를 완전히 지우더라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이보다 더한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이거 누구야, 지윤이 아냐? 오랜만이다.”
동아리 방에서 앉아서 담배를 피던 2년차 선배가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했다. 마침 1년차 동기들도 몇 앉아 있었다. 현진 선배의 귀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원진희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는지, 물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뜸해. 가을에 연극제 올릴 거 아냐? 이번에는 학부 애들에게 뭔가 보여 줘야지 않겠냐.”
논문 초안을 교수에게 딱지 맞았다는 이치영을 마지막으로 본 게 한 달 전이었다. 한 달만에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다시는 ‘모노드라마’ 동아리방에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오히려 나를 보고 오랜만이라고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에게 논문의 일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2년차의 대학원생들에게 ‘논문’은 금기의 단어다. 동아리방에 자욱하게 깔려 있는 담배 냄새. 이치영은 담배를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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