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그 남자 이야기, 5

박현규는 곡 하나를 다 듣고 현실 세계로 돌아와 쑥쑥해하며 일어났다. 나도 먼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가 학년으로 돌아가며 연신 돌아서는 것은 나는 한참 보다가, ‘모노드라마’의 동아리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원진희의 잔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하지만 익숙해질 것이다. 그가 없는 1년 동안 나는 생두를 밀봉한 채 열지 않았고, 오니치카 치히로의 음반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전에는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내 취미들이 봉인되어도 나는 살아 있었다.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이 뭐가 있는가. 그가 내 입술을 열고 옷자락을 파고 드는 꿈을 몇 번이나 꾸었다. 그가 고백하는 꿈도, 그와 함께 먼 나라를 여행하는 꿈도 나를 죽이지는 못했다. 이제 내 인생에서 그를 완전히 지우더라도, 나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삶에서 이보다 더한 일은 몇 번이나 있었다.

“이거 누구야, 지윤이 아냐? 오랜만이다.”

동아리 방에서 앉아서 담배를 피던 2년차 선배가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했다. 마침 1년차 동기들도 몇 앉아 있었다. 현진 선배의 귀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원진희가 돌아온 것을 알고 있는지, 물을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뜸해. 가을에 연극제 올릴 거 아냐? 이번에는 학부 애들에게 뭔가 보여 줘야지 않겠냐.”

논문 초안을 교수에게 딱지 맞았다는 이치영을 마지막으로 본 게 한 달 전이었다. 한 달만에 무슨 심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다시는 ‘모노드라마’ 동아리방에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오히려 나를 보고 오랜만이라고 말을 걸어온다. 나는 그에게 논문의 일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2년차의 대학원생들에게 ‘논문’은 금기의 단어다. 동아리방에 자욱하게 깔려 있는 담배 냄새. 이치영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

“이번에는 뭐 할지 정해졌어요?”

물으니, 2년차 선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근데, 실은 ‘조명’에서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던 참이다. 우리도 이번에 논문 들어간 사람이 많아서 좀 힘들고. 조명도 중요한 애들이 몇이나 어학연수 들어가 버렸다네. 어떻게 생각해?”

왜 하필 ‘조명’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 쪽은 마침 음향 담당이 신입생이라 불안한 모양이고, 지윤이 네 음향 감각이야 내가 알고. 우리쪽은 배우가 모자라고 저쪽은 배우는 충분한 거 같으니까.”

박현규가 떠올랐다. 그래도, 그 녀석이라면 분명 열심히 할 텐데. 내가 냉큼 들어가서 음향 담당을 맡아버리면, 그러면, 박현규는 괜찮을까.

“거기 음향은, 사람 있을 걸? 그, 누구더라. 영문과의 99, 지윤이 너 동기, 이번에 복학한다는데. 음향 담당이잖아?”
“뭐, 꼭 음향만 문제인 건 아니고, 우리 쪽에서도 이번엔 배우가 모자라니까 하는 소리지.”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연극 동아리라는 것은 확실히 드문 일이다. 동아리 활동들 중에 시간을 전혀 빼앗지 않는 것이야 없겠지만, 함께 많은 시간을 협의하고 어느 인원 이상의 꾸준한 참여를 필요로 하는 활동이, 대학원생이라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쉽지 않다. 현진 선배가 이 동아리를 소개해 주었을 때, 그리고 가을 연극제에 참여했을 때에도 나는 이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잘 몰랐다.

어떻게든 연극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모노 드라마’의 사람들 중에 연극 전공자는 없다. 그들 중에 연극에 관련된 직업을 가지게 될 사람이 과연 있을지도 모른다. 몇 년 전의 선배들 가운데에는 지금 어느 극단에서 조명을 담당한다거나, 유학을 가서 연극으로 방향을 선회했다거나 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던 모양이지만, 최근 몇 년간 ‘모노드라마’는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집단이었다.

“마침 그쪽 대본 초안 봤는데, 괜찮더라구. 거기 각본 하는 녀석, 쓸만하더라. 대학원에 꼭 오라고 꼬시고 싶을 정도였어.”

중언부언, 선배는 말이 길어진다. ‘조명’과 함께 무대를 만든다면 원진희를 마주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원진희는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한 마디씩 좋은 평들을 해주곤 해서 조명 사람들로부터 ‘촌철살인’이라는 별명을 받을 정도였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 쪽에서 그를 피하는 것이 이상한 소문으로 불거져서는 안 된다. 나는 소문이 어떻게 사람을 침몰시키는지 안다. ‘그 남자’가 어떻게 몰락했던가. 아직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을 때, 그 해 오월, 그는 5월 쟁투의 최루탄을 온 몸에 덮어쓴 채로 집으로 돌아와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 물처럼 맑은 술을 빈 속에 계속해서 들이키다가, 내 목을 졸랐다. 숨이 막혔다. 버둥거려도 내 팔은 그 남자에게 닿지 않고, 그 팔을 뿌리치거나 밀어낼 힘도 없었다. 붉은 눈으로, 최루탄 매운 냄새 그대로 옷에 남아서, 나쁜 년 죽일 년, 그 남자 그렇게 흐느끼다가, 어느 순간 손에 힘이 풀리고, 내 너머 누군가를 보고, 뒷걸음질 치고.

…그리고 그는 발을 헛디뎌 그대로 추락했다. ‘그 여자’는 흐느끼고, 통곡하고, 나를 슬금슬금 지나쳤다. 눈이 붉었던 건, 쓰라린 눈물이 계속 그렇게 흘렀던 건, 그 최루탄 매운 내음이 묻어서. 조합의 간부도 아닌 그저 흔한 보통의 직원이었던 그 남자의 죽음은 술에 취한 실족사였다. 조합에서는 흰 국화 화분 하나를 보냈다. 검은 리본이 묶인 흰 국화, 그 화분을 들고 왔던 남자. 그 때에는 그 남자가 그럴 줄 몰랐지. 그 남자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그렇게나 동료의 죽음에 무겁게 짓눌렸는지.

“지윤아?”

퍼뜩 놀라 고개를 드니 선배가 나를 본다.

“뭐해, 지금 가 보자는데. ‘조명’에서 연락 왔다니까.”

얼떨결에 일어나니 이미 다른 사람은 다 나간 후다.

내키지 않은 걸음으로 ‘조명’에 들려 음향 쪽의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멀찍이 서 있는 원진희는 몇 번 나를 보았지만,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말이 공동 작업이지 우리가 거의 기술지원과 배역지원을 하는 정도였다. 연출을 누가 맡느냐로 조금 이야기가 늘어지긴 헀지만 연출 쪽의 사람들이 다 논문에 들어가서 우리가 맡기는 힘들었다. 학부 3학년생인 ‘조명’의 연출들도 부담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가 길어진 덕에 집으로 돌아온 건 열 시가 넘어서였다. 여럿이서 소주 몇 잔을 기울이긴 했지만 나는 별로 마시지 않았다. 녹두거리의 얼큰한 김찌찌개에선 떠난 고장의 맛이 났다. 하지만 늘 그렇듯 술에 비해 안주는 부족했고, 나는 이야기를 술 삼아 안주 삼아 그렇게 있었다. 오피스텔 근처에 아직 문이 열린 떡볶이집에서 김말이 튀김 두 개를 넣은 떡볶이 일인분을 사고는, 선배 생각에 어묵도 1인분을 샀다. 혹 남더라도 어묵은 다시 끓이면 내일 아침에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기대한 것과는 달리 선배는 집에 없었다. 더운 열기를 씻으려 창을 열었다. 순간 바깥이 새하얗게 보일 정도로 거센 빗줄기가 쏟아붓기 시작했다. 장마철이 시작된 것일까. 문을 연 채 한참을 쳐다보았다. 원진희는 비를 싫어했다. 비도 눈도 너무 쨍쨍한 태양도 싫어하는 도시 사람이었다.

혼자 먹는 저녁은 지독하게 맛이 없다. 떡볶이 양념에 무친 김말이는 멍하니 있던 사이에 튀김옷이 양념에 불어서 뭉클해졌다. 소주 두 잔 들어간 속에서는 고춧가루가 부담이라고 신호를 보낸다. 나는 채 반도 못 먹는다. 늘 하던 일인데. 봉인한 커피를 풀어낸 때문일까. 아니면 조명에서의 원진희 때문일까. 샤워하다가 돌연 욕지기가 치밀어 저녁 이후 먹은 걸 모두 토해냈다. 시큼한 내음에 비위가 거슬려 물까지 모두 토해낸다. SOS, 몸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는 소리. 바보같지 굴지마. 익숙해져. 기대하지 마. 내가 떠나온 그 공간에서 원진희와 최나영이 뭘 했는지 같은 것, 상상하지 마. 원진희가 최나영의 어깨를 감싸고, 키스하고, 그리고….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안긴 바로 그 침대에서 곧장 최나영을 안지는 않았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는 내킬 때마다 나를 안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1교시 수업을 준비하는 날 안고, 프리젠테이션에 할 말을 중얼거리는 내 입에 키스해왔다. 그게 어디 원진희만의 문제였던가. 원진희가 그럴 때, 거절 한 번 제대로 안했던 나다. 입바랜 저항을 조금 하긴 했어도 그건 그저 원진희에게는 다른 효과만 줄 뿐이었다.

비틀비틀 쓰러지듯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버린다. 스프링이 끼익 운다. 빗소리가 들린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쿵쿵 심장이 뛴다. 그거 알아, 원진희? 나는, 비를 좋아했어. 비가 주룩주룩 내려서 공기에 습기가 촉촉이 젖어드는 날, 너와 함께 듣는 나카시마 미카, 그 목소리가 좋았어. 심장을 도려낼 듯이 내게는 절절했어.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니. 나는 너를 사랑했지만, 네가 사랑하는 건 늘 너 자신 외엔 없었는데.







깜빡 잠이 들었나보다. 반쯤 잠에서 깬 상태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던가. 걸음걸이가 타박, 마루 위로 옮겨졌다. 아아, 선배다. 몇 시쯤 되었을지 시계를 보려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윤이, 자니?”

산울림처럼 멀리, 실제보다도 답답하게 소리가 울린다. 대답하지 못한다. 선배가 빼꼼이 내 방문을 열고는 잠시 멈춘다. 열쇠로 잠그는 것을 잊었다. 뭄을 닦고 옷을 입지도 않았다. 선배는 천천히 다가와 깊이 한숨을 내 쉬었다. 왜 그래요 선배, 보고 있지 말아요, 선배 표정도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아픈 숨을 내뱉지 말아요. 왜 그렇게 서 있는 건데. 선배가 내게 다가와, 내 목덜미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이 바보야.”

선배가 중얼거리고, 내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문 손잡이 버튼을 꾹 누르고 선배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이건 꿈이다. 감히 내가 과분한 욕심을 내고 있는 거야.
2005/08/13 16:08 2005/08/13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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