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문소리가 났다. 벌떡 놀라 일어났다. 이 집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더라. 내가 그에게 열쇠를 준 적이 있었나? 아니, 내가 이 곳으로 이사 온 건 그가 일본에 있는 동안이다. 어디쯤인지도 그는 오늘 겨우 알았다.
"지윤이, 들어왔구나?"
방문만 빼꼼이 열고 불안스레 내다본 현관에는 이현진 선배가 서 있었다. 반가운 마음보다 선배 손에 들린 짐에 먼저 눈이 갔다. 돌아온 건가. 그럼, 나가야 하는 걸까.
"사촌 동생이 결혼해서, 결혼식 가 보느라 잠시 들어왔어."
내 맘을 읽은 듯이 선배가 말했다.
"잠시만요 선배, 저 옷 좀 입고요."
"응, 그래라."
주섬주섬 티셔츠에 반바지를 꿰어 입고 나갔을 때 선배는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주전자는 선배 것이었다. 이 집에 대부분의 것들이 그러하듯이.
"핫초코 갖고 왔다. 지윤이, 너 먹을 수 있지?"
"예…."
헐렁한 옷차림의 선배는 내가 처음 이 집에 초대받았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핫초코를 끓여서 내게 내밀었다. 내가 잔을 두는 위치나 선배가 잔을 두는 위치는 같다. 맥심 커피의 사은품 머그, 핫초코가 달콤한 김을 뿜는다. 여름 날씨지만 찬물 샤워로 몸이 추워서인지 그 김이 반갑다. 늘 신기했었다. 선배는 어째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지.
"표정이 나쁘다, 너. 설마, 진희한테 연락 온 거야?"
"…귀국했어요. 오늘 만나고 왔어요."
선배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그 녀석은 너한테 나빠."
"…아하하."
선배에게 처음 원진희와의 일을 고백했을 때, 선배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그 때도 선배는 저 말을 했다. 그 녀석은 너한테 나빠. 좋아한 건 나였다. 그러니, 원진희가 내게 손을 뻗었을 때, 나는 당연히 응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들은 적 없지만,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쓸어주고,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내 옷을 벗기는 온기가 그 의미일 거라고 멋대로 해석했다.
"나는 저 방 쓸 테니까 신경 쓰지마. 며칠 있다가 돌아갈 거니까."
선배가 골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선배, 거기 짐 가득 들어차 있어서..., 먼지도 많구요."
"먼지는 청소 하면 되고. 몸 누울 자리는 있어. 괜찮아. 코드 있으니까 노트북 쓰면 되고."
선배는 슥 일어나서, 욕실 문을 열었다.
"나 피곤하니까 씻고 잔다. 지윤아, 방문 잠그고 자라. 내가 덮쳐버리고 싶어지면 곤란하니까."
풋, 웃고는 설거지를 하려고 일어났다. 선배가 수트 케이스에서 갈아입을 옷을 꺼내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딸깍, 문을 잠갔다. 선배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선배가 이 편이 편하다면, 나는 그대로 해 주는 것이 옳다. 컴퓨터를 켜고, 교수님께 받아온 원고를 뒤적였다. 교수님이 훑어본 후 이 글은 교수님의 이름을 달고 나가게 될 것이다. 젊고 유능한 교수. 매년 많은 양의 책을 번역해 내는 대외적인 이미지 덕분에 30대의 나이에 전임강사 자리에 올라 있어도 사람들은 납득했다. 그건 나와 교수님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내가 교수님의 일을 해 주는 대신, 교수님은 조교 월급 외의 수당을 내게 주었다. 다른 곳에서 일을 받아 하는 것보다 나은 수입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번역 일에서 대학원생이, 자기 이름을 책에 낼 수 있을 정도의 일을 따내기는 힘들다.
딸랑, 문 밖에서 방울 소리가 들렸다. 선배의 열쇠고리에서 나는 소리다. 은으로 만든 열쇠고리. L.H.J. 선배가 영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 앞 금은방에서 은으로 된 열쇠고리를 주문했다. 이니셜끼리 체인 두 개로 이은 디자인을 밤새 끙끙 구상해서 들이대고, 완성품이 나온 것이 선배 출국일이었다. 집을 빌려준 데 대한 감사 표시로 쓰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선배가 남겨놓은 집 열쇠 중에 하나를 거기 끼워서, 떠나는 선배 손에 건넸었다.
- 한국 들르시면 꼭 집에 오세요, 호텔 같은 데 묵지 마시고요.
- 야, 이거 눈물 날 것 같아, 지윤아.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면서 열쇠고리를 꼭 쥐었다. 선배는 두 번 돌아보았고, 내게 열쇠고리를 짤랑, 흔들어 보였다. 그 소리를, 다시 듣기를 기대했었다. 원진희와의 일을 아는 것도 선배가 유일했다. 오래 전, 커다란 벚나무 아래에 마르케스를 읽고 있을 때, 말을 걸어온 상대가 선배 뿐이었던 것처럼. 내게 동아리를 권했을 때 연극부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도, 선배의 동아리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피붙이처럼 그렇게 편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이런 날, 몸 안에 아직 욱신대는 감각이 남아 있는 이런 날에, 혼자 깜깜한 방에 잠드는 것은 서글프다. 옆방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만으로 마음은 훨씬 누그러져서, 나는 깊이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음악을 틀지 않은 채로 나는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한다.
오래전 꿈을 꾸었다. 나는 새내기였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이름의 자리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술잔과 소주병을 같이 들고 와 내게 따르며 그는 싱긋 웃었다.
"한 잔 해, 너 이름 뭐냐?"
"한지윤입니다."
선배라고 생각했다. 거침없는 동작도 그랬고, 사람을 주눅들게 만드는 위압감도 그랬고. 그 눈빛은 새로운 환경에 불안해하는 새내기의 눈이 아니었다. 왁스를 바른 염색한 머리, 걸고 있는 목걸이, 헐렁한 티셔츠. 너무나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귀에 걸치고 있는 이너폰까지도.
"어이, 원진희, 너 98처럼 굴래? 한지윤, 그 놈 너랑 동기야. 존대할 필요 없다."
어떤 선배가 그렇게 말을 하고서야 난 얼굴을 붉혔다. 얼떨결에 들이킨 소주가 속으로 뜨겁게 퍼져서인지.
그 날의 일은 꿈에서조차 흐릿했다. 나는 취해서 기숙사의 입실 시간을 놓쳤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의 기숙사생들이 학회실에서 웅크리고 선잠을 잤다. 3월 초는 아직 추웠다. 나는 사람들의 온기가 닿을 때마다 흠칫 놀라, 제대로 삼십분도 채 잠을 자지 못했다. 7시 쯤, 사람들이 채 등교하기 전에 일어나서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기숙사로 달려갔다.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있고 싶지 않아서, 기숙사에서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숙취로 쓰린 속을 커피로 뒤집어 놓고, 1교시 수업이 있는 교실로 달려가다가, 원진희를 만났다.
"잘 들어갔냐?"
"...응."
아직 젖은 머리를 의식하며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무슨 샴푸 쓰냐?"
"...뭐?"
돌연한 물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당연히 물을 것을 물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머리결, 좋다. 기르는 거지? 좋겠네. 나는 돼지털이라서, 그냥 왁스 하는 게 차라리 낫거든."
그가 다가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좋아해, 지윤아."
화득, 꿈에서 깨어난다. 눈이 젖어 있다. 꿈은 거짓말이다. 그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 날 그는 그렇게 말을 던져 놓고는 멀어져갔다. 1교시 수업은 같은 교실이었지만, 대강당 거의 끝자리에 앉은 그를 지나쳐 나는 앞에서 세 번째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와는 아무 일도 없었다. 동요하는 건, 항상 나였다.
역장
2005/05/10 15:58
2005/05/10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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