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그림자의 노래, 그 남자 이야기 12

갑자기 마음 한 쪽이 싸하게 아려왔다. 저 눈, 더럽혀지지 않은, 굽힘없이 빛나던 그 눈, 음악을 이야기하며 생기로 반짝이던 남자의 눈이, 변함없이 곧은 빛을 품고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저 눈을 알고 있었다. 저런 눈으로, 입으로 나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나는 지금 그 얼굴을 떠올리고 마는가.

"…저는…!"

눈과 같은 말을 하려고 입술이 열렸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젖은 눈에서 물기를 떨어낸다. 울지 않아. 원진희 때문에 울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그런 눈으로 나를 보아선 안돼.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입술을 곱씹으며 말했다.

"이건 내 문제야. 무슨 의도로든 제 3자가 끼어드는 건 사양이야."

다정한 선배의 얼굴을 거두고 차갑게 말을 뱉았다. 가방을 바투 쥐고 어쩔 줄 몰라 입술을 떠는 그 얼굴에서 돌아섰다. 학과 사무실에 들르자, 교수님을 뵙자, 그런 일들을 중얼거리며 나는 내 등 뒤를 계속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에서 멀어진다.




수업에 다시 복귀해서, 의외로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하지 않은 것에 놀랐다. 텍스트는 쌓여 있었고 해야 할 과제도 몇 건인가 있었지만, 오래 자리를 비운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내게 묻는 사람도, 호기심의 눈빛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논문의 결과가 가장 신경쓰이게 마련인 원생들에게 동기가 수업에 나오는지 나오지 않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교수님의 새 원고가 마무리되었을 즈음에는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지윤아."

완성된 원고가 든 메모리 스틱을 받고 나서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현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는 거 알고 있냐?"
"…네."

뭐라 대답할 지 몰라 한참 후에야 맥없이 대답했다.

"어제, 가위에 눌렸다."

주어가 생략된 말.

"안 돼, 지윤아, 안돼, 라고."
"……."
"…그리곤 울더라. 한참 울다가…, 엄청난 얼굴을 하고는 도로 잠들었다."
"…상태는 어떤가요?"

머뭇거리다 물었다. 교수님은 한참 나를 보고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나고 싶은 게 아니냐고, 불러올까 그랬는데 대답을 안 하더라. 그냥 고개만 젓고. 고등학교 때 같아. 고집스럽게 뭔가 생각하는데 말을 안해. 입을 아예 닫은 것 같이."

나는 현진선배의 고등학교 시절을 모른다. 내가 아는 선배는 늘 웃고 있었고, 내 일로 화를 내 주었고, 내 사물함 앞에 포스트잇으로 힘내라고 격려의 말을 남겨놓던 사람이다. 선배가 나를, 세상을 거부하다니. 선배가 말을 닫다니.

선배가 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부디 아니길 바라는 거다 이것은. 선배가 그 때 깨어 있지 않았었다고, 선배가 깨어난 건 내게 말을 건넨 그 순간이고-, 그 전에는 어떠한 것도 선배는 몰라야 된다고…, 나는 그렇게 믿고 싶은 것 뿐이다.

"와 주지 않겠냐. 무슨 핑계를 대도 괜찮다. 이 원고라도…."

교수님이 처음으로 내게 부탁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를 낫게 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선배가 그렇게 된 건, 밤의 차도에 다시 뛰어든 건 내가 준 열쇠고리 때문이었고-, 지금도 선배가 가위에 눌리는 건 나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내가 어떻게.

"…학과 사무실에 네 우편물이 있던데. 조교가 매번 잊어버렸다고 난처해 했다."

교수님이 말을 돌렸다. 나는 안도한다.

"또 일 생기면 연락하마. 핸드폰 꺼 놓지 마라."




학과 사무실에 들어가자 조교가 날 보고 가볍게 목례했다. 김태원은 취직하면서 사직한 전 조교의 빈자리에 6월부터 온 동기생이었다. 학부가 달라서 동기라고 해도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도 별로 없고, 서로 아직 존대를 쓰는 사이였다. 학부생 몇 명이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는가 게시판을 훑고 있고, 김태원과 같은 언어학과 출신인 이주형이 소파에 앉아서 전공 서적 몇 권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한참 있어도 아무 말이 없는 걸 보니 또 잊어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아직 내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지 못하거나.

"우편물이 온 게 있다고 하던데요."

내가 말을 꺼내자 그제야 아, 하고 벌떡 김태원이 일어났다.

"부피가 꽤 커서, 연락을 한다고 하고 자꾸 잊어버렸네요."

두툼한 소포뭉치였다. 발송자도, 발송 주소도 없이 굵은 글씨로 수취인란에 학교의 주소와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나서야 그 글씨가 눈에 익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류처럼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사람이 더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을 것이다. 아니…,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어째서 네가, 어째서 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피에 비해 가벼운 뭉치가 내 손에 들려서, 더할 나위 없는 존재감으로 밀어닥쳐서.

"논문 준비 시작했어요?"

이주형이 대뜸 내게 물었다.

"아니오, 아직…."

멍하니 대답했다.

"다행이다. 나도 전혀 못해서."

반말도 존대도 아닌 얼버무림으로 이주형이 웃었다.

"태원이 이 자식이 막 압박 줘서. 혼자 놀고 있는 놈 취급을 하고."
"…3학기 때 시작하면 빠듯하다고들 하니까…, 슬슬 시작해야 하긴 하죠."

나는 웃으며 김태원의 편을 들어 주고는 말을 돌렸다.

"그럼 고맙습니다, 내일 수업 때 보죠."

학과실을 나오는데 후끈한 열기가 숨을 파고든다. 여름이다.

허둥대며 지하철을 탔다. 이어폰을 꽂았다. 누군가가 날 불렀던 것 같았지만 모른척 귀를 막았다. 시이나 링고의 스산한 소리가 귀를 채웠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새로운 커피를 마시고, 새로운 사람과…, 그러나 여전히 내 손에는 끊어지지 못한 글씨가 무겁게 낙인뒨 우편물이 있다. 땀을 흘리며 문을 열고는 털썩 대자로 누웠다. 바닥에서 차가운 기운이 올라왔다. 등이 차가웠다. 거칠게 날 밀어올렸다. 병실의 차갑고 축축하던 공기 속에서 원진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당연히 그에게 안기리라 여겼을까. 더 이상은 싫다, 고 말했는데도.

가위로 소포를 끊었다. 포장 안에 든 건 쇼핑백이었다.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상표의 구겨진 쇼핑백 안에 잘 개어진 청바지가 들어 있었다. 내 치수였다. 너무 짙지도 너무 연하지도 않은 색. 손 끝에 만져지는 촉감이 부드러웠다. 분명 고가품일 게다. 티셔츠 하나도 싼 것을 입지 않는 그였다. 그저 물쓰듯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제력을 향유했다. 그가, 내게 이 바지를 보낸 것이다. 원진희, 그가.

그는 모를 것이다. 세상에는 지하철 한 구간의 요금 때문에 오십여분을 걷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홈플러스의 이월 상품 할인에 맞춰 판매하는 칠천원짜리 운동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멋부리는 것과 다른 이유로 머리를 기르는 사람, 대학 교재를 산 달에는 학관 식당 국수로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시디 한 장에 손이 떨리고 계절이 바뀌면 지난 해의 옷이 아직 맞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욕실로 들어가 찬물을 틀었다. 온 몸에서 닭살이 도도독 돋았다. 이가 부딪히도록,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도록 계속 계속 찬 물줄기를 맞으며 그냥 나는 그렇게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도록,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원진희가 했던 그 눈빛을, 놀라고 상처입은 그 얼굴을 떠올리지 않도록 계속해서.
2006/05/08 10:35 2006/05/0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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