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그 남자 이야기, 10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셔츠의 단추를 잠그다 보니 단추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저편에 새하얀 플라스틱이 눈에 들어왔다. 단추를 집어들다가 으슬 오한이 스친다. 무서웠구나. 뒤늦게 내 감정을 확인하고 하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 욕실로 들어가 아래를 씻고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새로 입었다. 원진희가 보였던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거칠던 손끝의 열기, 아직도 입술에 떠도는 뜨거움.

선배의 옆에 앉았다. 잠든 듯이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는 선배를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선배.”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길고 가느다란 선배의 손가락을 감쌌다.

“다시 보지 않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무서워서… 무서워서…, 이런 제가….”

띄엄띄엄 서툴게 말이 새어나간다.

“……지윤…아?”

귀를 의심했다. 손끝에서 선배의 손가락이 푸득, 떨었다.

“선배?”
“…너, 왜……, 여기… 있어.”

의문문인지, 아니면 그냥 맺음말로 한 건지. 급하게 호출 버튼을 눌렀다. 당직의가 올 것이다. 선배는 눈꺼풀을 무겁고 힘겹게 파들거리다 멍한 눈으로 천장을 보았다. 나를 찾아 시선을 돌리기에 내가 그 끝으로 고개를 가져갔다. 검은 눈이 서서히 초점을 맞출 즈음에 당직의가 도착했다.

나는, 병실에서 쫓겨났다.

귓속에서 차게 앤 아스카가 들렸다. Say Yes, Say Yes.

학교에서 교수님이 달려왔다. 의식만 찾으면 골절이 아무는 것을 기다리는 것만 하면 된다고 그랬다. 검사실로 간 선배가 돌아올 때까지 병실 복도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에 교수님이 선배가 탄 휠체어를 밀고 돌아와 나를 보았다. 퀭하니 핼쓱한 선배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수고했다. 이제 집에 돌아가. 계속 애썼다.”

교수님이 이야기했다. 선배는 나를 스치듯이, 그대로 통과하듯이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교수님이 빌려준 노트북과 CDP와 음반을 챙기는 동안 나는 완전히 그 공간의 타인이었다. 선배에게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병원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이미 막차가 끊긴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택시를 탈 돈은 없다. 가방끈을 단단히 조이고 나는 걸었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도 없다. 도시는 메마른 형광색의 불빛만을 뱉아낼 뿐, 차가 지나가는 소음과 바람소리만이 공기에 가득 차 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버스 노선을 따라 걸었다.

새벽 공기에 뿌옇게 시선이 밝아졌을 즈음 다리는 나무처럼 딱딱해져 있었다. 뻐근한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오래 비워둔 집에서는 먼지 냄새가 난다. 버석거리는 이부자리가 부담스러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줄기가 다리에 닿으니 오한이 또 일어난다. 벽에 기댔다. 습기 어린 창 너머 뿌연 풍경을 보면서 나는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선배의 눈빛, 선배의 태도, …그리고 원진희.

갑자기 저물어 버린 더위처럼 시간은 뻥 뚤려버린 듯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음악이 필요해. 차게 엔 아스카? 아니. 오니츠카 치히로? 아니. 나카시마 미카, 아니, 오페라의 유령, 아니 아니. 무엇이 내 것이었고 무엇이 외부였는지 경계가 허물어져 무너지고 내 것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조차도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하루를 꼬박 방 안에 웅크려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수많은 꿈이 떠돌았다가 사라졌다. 깨어났을 때는 선배가 다시는 나를 보지 않으려 할 지도 모른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넋나간 사람처럼 수업에 다시 나갔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번역을 했다. 아무런 가사도 없는, 칸노 요코의 연주곡들이나 혹은 아주 오래 듣지 않았던 바하의 첼로곡들을 CDP에 넣고 다녔다. 세상과 단절하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침묵하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땅을 보고 걷는다.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은 드물다. 누구나 거절당하는 걸 두려워한다. 조명의 사람들이 학교 안에서 날 보았더라도 쉽게 말을 붙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등 뒤로 시간을 흘러 보냈다.

조명과 모노 드라마의 일이 생각난 건 번역의 원고를 교수님께 넘기고 난 다음이었다. 혼자서 어떻게든 하고 있을까, 성실하고 고지식해 보이던 1학년 박현규의 얼굴이 떠올랐다. 공연까지는 좀 더 넓은 조명의 동아리방을 같이 쓰게 될 거라고 말했던 기억을 더듬어 조명의 문을 두드렸다.

“어 오랜만이다, 지윤이 아냐.”

뭔가 정리중이던 동기가 반갑게 인사했다. 후배들이 꾸벅꾸벅 인사해 오는 것 사이사이로 낮게 내 이름을 귀뜸해주는 소리들도 들린다.

“너 못 본 사이에 더 마른 거 아니냐?” 동기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겠지만.

“딱히 체중관리를 하는 건 아닌데. 무대에 올라가는 것도 아닌걸 뭐. 공연 준비는 잘 돼 가지?”

웃는 얼굴로 물으니 긴장되었던 공기가 조금 누그러진다.

“저…, BG 선정한 건데 좀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박현규의 얼굴에 조금은 대학생 티가 배어 있었다. 옅은 담배 냄새가 번진다. 전에는 피지 않는 것 같더니.

“그럼 밖에서 둘이 좀 이야기 해 볼께.”
“그래 그래, 그 녀석 원진희도 갑자기 안 나와서 혼자서 낑낑댔어. 엉망진창이면 막 혼내 줘라.”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서늘해지는 머리를 들킬까봐 급히 동아리방을 나왔다.

대본을 읽는 속도는 빠른 편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제대로 읽어 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각본 녀석도 있었던가. 훑으면서 지나가는 곡명들이 다양하다. 현대적인 분위기에 맞춰진 느낌이었다. 클래식 곡명이 들어와서 보면 뉴에이지 풍의 편곡자 이름이 뒤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뮤지컬 곡이 몇 곡. 감정의 흐름에 꽤 잘 맞춰져 있는 솜씨가 초보자 같지 않다.

“전체적으로 잘 되어 있네.”

녀석이 환히 웃는다.

“그런데 이거, 이건 좀 더 생각해 볼래? 지킬 앤 하이드, 너무 떴잖아. 앵콜 공연에다, 암표까지 돌아서 연극 팬들은 거의 다 최근에 봤을 텐데. 이 곡은 원작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아.”

짧은 대답에 또 얼핏 담배 내음이 풍긴다.

“뮤지컬 곡 쓰는 게 사건별로 어울리는 곡 찾기도 쉽고 그렇긴 한데, 유명한 건 조심하는 게 나아. 연극이 한창인데 아 이거, 하고 중얼거리는 사람이 생기거나 할 수 있거든. 창작곡을 쓸 수 있으면 제일 좋지만 여건이 안 되니.”

“예에,” 주억이는 녀석을 보다가 불현듯 물었다.

“담배 펴?”
“예? 아, 예…, 어, 얼마 전부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으면 끊지 그래? 몸에도 안 좋은 걸 뭐하러 일부러 배워.”

무심히 말했다. 녀석이 벌개진 얼굴로 푹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그만 웃어버린다.

“나한테 죄송할 일이야? 뭐, 그냥 하는 소리야. 하루에 한 갑이면 열흘이면 얼마야? 그 돈이면 CD 한 장을 사겠다, 그게 내 생각이어서. 기호식품인데 누가 뭐라고 할 성질이겠어 그게.”

설명하다보니 구차한 기분이다. 내가 이 녀석을 야단칠 이유가 또 뭐가 있는가. 그럴 자격이 있는 위치도 아닌데다가.

“그런 기분으로 다시 한 번 짜 봐. 어지간하면 분위기는 하나로 통일하는 게 좋은데, 그건 지금도 잘 돼 있네. 강렬하게 강조되는 캐릭터의 상징 음악을 넣어 보는 것도 좋고. 지금도 처음 한 것치곤 잘 돼 있으니까 편한 마음으로.”

끄덕거리는 녀석의 얼굴이 진지하다. 아 그래, 이런 얼굴이 보고 싶었어. 누군가가 열중한 얼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몰두해 있는 얼굴. 내가 그래서 이 녀석을 만나고 싶었던 거구나.

“지윤 선배.”

그림자가 느껴진다 싶더니 눈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있었다. 최나영. 언제나 밝은 빛을 데리고 다니는 것 같은, 원진희의 그녀. 나는 태연하려 애쓰면서 그 얼굴을 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일? 이라고 물었던 것 같다. 박현규가 난처하게 일어나 자리를 피해주고 나자 최나영은 확연히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동거했던 거에요? 진희 선배랑.”

물음이 아니다, 추궁이다.

“내가 원진희 오피스텔에서 살았던 거 이제 알았어?”

의미를 알면서도 모른 척, 부질없이 화두를 돌려 보려 애쓴다. 소용없을 게 당연한데도.

“깨끗한 척 순수한 척 혼자 다 하더니, 그랬던 거예요? 그러면서 진희 선배가 일본 가니까 재빨리 딴 사람에게 붙은 거네요? 그래놓고 또….”

“현진 선배는 관계 없어.”

말을 잘랐다. 선배는 안된다. 선배는 내개 얽혀도 좋은 사람이 아니다. 원진희와의 일은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고 내 책임이었지만 현진선배만큼은 그래서는 안 되었다.

“더러워.”

최나영이 짧게 내뱉었다. 붉은 눈이다. 거꾸로 뭔가가 치밀어 오른다. 갑작스레 겹쳐지는 환영. 그가 병실에서 내게 했던 것,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마자 욕심스럽게 내 안으로 들어오던 일…, 그리고 그는 최나영을 아마도 그렇게 안았을 터다. 목마르게, 욕심스럽게, 뜨거운 눈으로 최나영의 몸을, 얼굴을, 눈을 핥았을 터다. 오직 그 때만 보여주는, 간절한 눈빛을 했을 터다.

“뭐가?”

차갑게 말이 새어나왔다. 손이 빳빳하게 굳는다.

“너랑 원진희랑 사귀는 거 학교가 다 알거든. 그건 깨끗하고? 네 연애는 아름답고 청결하고, 나는 더러워?”
“틀려요! 나랑 선배랑은…! 어디다 비교하는 거예요!”
“웃기지 마. 나 너한테 무슨 소리 들을 정도로 죄 지은 거 없어. 더러워? 거울이나 보지 그래?”

짧게 말을 자르는데 화끈 뺨이 달아 올랐다. 최나영의 붉은 눈에서 투둑 물기가 흘러 내린다.

“선배가…, 왜 이딴 사람을…!”

돌아섰다. 최나영이 팔을 잡았다. 뿌리치고 노려본다. 울고 있는 여자를 본다. 원진희의 그녀를, 미워할 수는 없지만 결코 좋아할 수도 없는 그 여자를 본다.

“진희 선배 어디 있어요? 알고 있죠?”
“원진희 못 본지 한 참 됐어.”

재차 돌아선다. 훌쩍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이 보았겠지. 수근대겠지. 동거라고? 그랬던 거야? 소문이 소문을 낳을 게다. 아아, 다 상관없다. 아무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고쳐 매었다. 오지 말 걸. 그냥 평소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집에서 무엇을 하면 좋은가. 알고 있었다. 원고를 넘겨 버린 지금 텅 빈 집이 내게 어떨지, 선배의 소식이 오지 않을까 끙끙대면서 있는게 두려워서 나는 여기 오지 않았나.

“…선배….”

등 뒤에 들리는 목소리에 멈추어 섰다.

“괜찮…으세요?”

머뭇거리는 목소리. 현진 선배가 아니다. 이제는 아무도 만들지 않을 테다. 약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 같은 건, 나를 지탱하는 타인 같은 건 바라지도 만들지도 않을 테다. 그러는 순간, 불쑥 눈 앞을 덩치 큰 그림자가 막아선다.

“정말…이에요? 그…, 원진희 선배…와.”
“…충분히 추궁 당했으니까 너까지 이러지 말아줄래.”

너는 타인이니까. 아직 너는 내 인생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나쁜 사람 이었군요….”

응, 그래. 네 눈에 어떻게 내가 보였는지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불러도 돼.

“…그러고 저 여…선배한테 가 버리고…, 원진희 선배…나쁜 사람이네요.”

띄엄띄엄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놀라 박현규를 보았다.

“…울지 마세요, 지윤 선배…. 그런 사람 때문에… 울지 마세요.”
2006/02/11 14:51 2006/02/1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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