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언제나 먼 곳을 떠돌고, 영혼은 늘 낯선 바다의 공기를 그리워한다.
 
그 남자 이야기, 8
그 남자 이야기, 9


병실에 노트북 사용이 되는지를 알아본 후에 교수님은 내게 노트북을 빌려 주셨다. 다른 교수님께 사정을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고 간단히 이야기를 전했다. 원고의 마감은 연기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거의 병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선배는 의식이 없는 동안 주사제만으로 영양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배를 채우러 밖을 나오긴 했지만.

마치 시간이 완전히 멈추어 버린 듯이, 병실 안은 그대로 가을을 향해 접어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공용의 세면장에서 몸을 씻고 돌아오면 선배는 그저 잠든 듯 계속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언제 의식을 차릴지도 알 수 없었다. 회진을 온 담당의사는 순조롭게 회복되고 있다, 고 했지만 나는 종종 선배가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거라는 선고를 받는 악몽에 시달렸다. 잊어버리려는 듯이 번역에 몰두하다가 결국 집에 들러 시디를 몇 장 챙겨 왔다. 정적이 흐르는 1인실은 그대로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롭게 아름다워서, 음악조차 없으면 나는 그 병실의 안으로 녹아들어가 함께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교수님은 2-3일에 한 번 병실에 들렀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선배의 집, 영국과 한국 어느 쪽에도 선배의 사고 소식이 들어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병실에는 교수님 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으므로. 교수님은 항상 조용히 앉아 있다가 일어나 돌아갔다.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르겠는데.”

돌연 교수님이 물었다. 나는 교수님과 선배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타이핑을 하고 있다가 에, 하고 고개를 들었다. 대답이랄 것도 없는 짧은 탄성이었다.

“사귀는 사람 없어?”

담담한 목소리였다. 회진은 보통 몇 시에 오냐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너 알게 된지도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내가 학생들 개인적인 일은 잘 모르는 편이라.”

어느 교수님이든 그건 마찬가지였다.

“원진희인가 하는 녀석처럼 화려하게 소문을 뿌리고 다니면야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지만. 너랑 동기였던가. 너 학교 안에서 딱히 누구랑 친한 것 같지도 않고.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교수님이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젊은 나이에 지금의 위치에 오른다는 건 운만으로도 실력만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나는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평온한 표정이어도 지금의 눈은 묘하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무엇을 지금 내게서 살피고 있을까, 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무언가.

“너랑 현진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네.”

순순히 대답했다. 사귀는 사이였다면 오히려 선뜻 그 집에서 살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배가 영국을 간다고 했을 때, 이미 나는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명백한 것은 그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두 사람의 출국, 어느 쪽이 나를 뒤흔들었나. 이 무심한 교수님조차 알 만큼 다른 사람과 연애를 했던 그 녀석. 지금도 그 이름만으로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는.

“조카가 이 녀석 뿐인 건 아닌데…, 이상하게 이 녀석이 날 따르더라고. 왜 그런지는 모르지. 교수가 되고 싶어 하나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아니고. 이 녀석 머리는 좋아도 묘하게 차가운 데가 있어서, 사람 상대하는 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

“차갑…지 않았어요.”

“이 녀석 살갑잖기로 유명한데? 고등학교 때는 더해서, 자기 가르치던 담임이 해고됐는데, 애들 다 운동장에 꿇어앉아 단식하는데 혼자 집에 온 녀석이야.”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선배의 고등학교 후배였던 동기 하나가, 경멸을 담아 들려주었던 이야기. 나는 금방 잊어버렸다. 소문이라는 것이 원래 실제에다 감정이 더해져서 왜곡되기 마련이니까.

“그런 점이 나는 맘에 드는 거지만. 그래도… 또 다정하기도 한 녀석이니까.”

나는 진심으로 예, 하고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는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과분할 만큼 받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을, 선배는 내게 주었다.

“…젊은 애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교수님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너는, 너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냐?”

남자 같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교수님이 나를 보았다.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호하다.

“애매한 위치에 있지 마, 많은 사람이 피곤해 진다. 한 사람만의 일이라는 건 원래 없어.”

교수님은 선배의 환자복을 조금 쓰다듬었다.

“아는 친구 하나가, 미혼모인데.”

나는 담담히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좋아했던 게 하필, 유부남인데다, 언니의 남편이라. 그러곤 겁이 없달지, 애까지 낳았지. 그런데 그게 어디 혼자만의 문제가 되나. 그 사람 가정을 깰 생각이 있건 없건, 관계된 사람이 이미 숱한데. 혼자 잘 정리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게 되겠어.”
“…….”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의 아이를 낳는 일이, 그렇게 항상 일어날 정도로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기에 그 사람, 그렇게 술을 마시고. 그러기에 그 사람, 늘 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친구분은, 그럼…?”

“언니라는 사람이 착해 빠져서, 그 아이를 자기 애 삼아서 키웠어. 친구는 그 뒤로도 다른 남자 못 만나고 계속 혼자 살지. 지 자식인데 자식이라는 소리도 못하고. 그게 자기가 책임지는 방식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뭐야. 벌써 몇 사람이나 상처 입히고. 제 한 몸은 편해 졌는지 몰라도.”

나는 교수님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교수님의 눈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렇게 내려다보는 각도에서는 더더욱 없었다. 아아, 이 사람이 이런 눈을 하고 있었구나. 이런 눈으로 현진 선배를 보는 거구나. 가슴 한쪽에서 따뜻한 무언가가 번져나갔다.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그러면서도 무척이나 포근한 감각이었다.

“아마… 편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단정하게 묶은 교수님의 머리카락과, 곧은 이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까이에서 그냥 보고 있는 것, 힘드셨을 거예요. 아예 다른 곳으로 간 것보다 나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한 몸 편한 일은 아닐 것 같아요.”
“…….”

쿡, 교수님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학부생들이 무섭다고 말하는 그 웃음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무섭게 들리지 않았다.

“볼수록, 여성스럽구나.”

교수님의 말 뜻을 몰라 눈을 크게 떴다.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쁜 의미로 듣지 말고. 좋은 뜻이야. 그게 천부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통 안 되던데.”
“자주 듣는 말인걸요.”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오늘은 다른 후배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과는 다르게, 아프다.

“그럼 나 이만 돌아갈게. 잘 부탁한다.”

교수님이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나는 교수님이 쓰다듬었던 선배의 환자복을 조금 매만졌다.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배는 깨어나야만 했다. 아직 선배에겐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내 기준이 아니라 선배의 기준을 듣고 싶었다. 선배는 원래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가 같은 사소한 것들부터 선배가 내게 맞춰왔을 많은 것들이 원래는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CDP를 켰다. 이런 날엔 나카시마의 ‘Music’ 음반이 제격이다. 케이스에 꽂혀 있는 시디를 빼서 플레이어에 넣었다. 잠시 첫 곡이 흘러나오다가 갑자기 플레이어가 멈추었다. 액정도 꺼졌다. 충전을 한 것이 언제였더라. 노트북의 외장 시디롬 드라이브는 처음부터 받지 못했다. 충전기에 배터리를 넣는다. 오랫동안 나와 같이 한 CDP, 주머니 모서리가 조금 닳았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의 시간이 흐른 게다. 이 낯선 도시에 올라온 지도.

시디 지갑에서 시디들을 꺼내서 정리했다. 충전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차게 엔 아스카의 베스트 앨범. 선배가 눈을 뜨면 틀어 주리라 생각해서 늘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하철 1호선과, 오니츠카 치히로와, 그리고 ‘오페라의 유령’. 브로드웨이 공연의 녹음판이다.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듯이 화득 놀라 급히 도로 시디 지갑에 챙겨 넣었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을까.

그래, 언젠가, 그런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무심히 CDP를 켰을 때 낯선 음악이 나와서 놀랐던 적. 원진희는 나에게 미리 말하지도 않고 CDP 안의 시디를 바꾸어 놓고는 했었다. 참으로 원진희 다운 선택이곤 했었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같은 집에 살고 있을 때는, 일본으로 가 버리기 전에는, 그것이 호의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듣던 음악을 나도 듣게 하려는 것. 내가 좋아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자신의 것으로 녹아내 버리는 원진희가 내게, 자신만의 것을 주고 있는 거라고. …그러고 보면, 왜 그러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나. 그러고 보면, 이제 만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입 밖에 낸 적이 있었나. 혹시라도 원진희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세수를 하려고 병실을 나왔다. 금방이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세수를 하려고 얼굴에 물을 갖다 댔을 때, 뭔가 뜨뜻한 것이 흘러 내렸다. 붉은 방울이 점점이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피. 선배는 얼마나 피를 흘렸을까. 그에 비하면, 검은 아스팔트에 뜨겁게 번졌을 선배의 선혈을 생각하면, 이런 것이야. 피가 뚝 뚝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한참 보고 있는데, 들어오던 간호사가 깜짝 놀란다. 무슨 말을 하면서 나를 끄는지 귀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뭔가 처치를 하고, 걱정스럽게 뭔가 말을 하고, 그 모든 것이 남의 일인 듯이. 한 시간 가량을 붙들고 있더니 가제도 도로 떼어 내고 가도 좋다고 한다. 그 말만이 겨우 들려서 슥슥 추슬러 병실로 돌아온다.

문을 열었다.
원진희가, 있었다. 나는 뭔가 말했다. 무어라 말하나, 내 목소리가 무슨 말을 만드나.

“궁금해서.”

평소같지 않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아아, 소리다. 처음으로 선명하게 생명을 갖고 소리가 귀 안으로 들어온다. 차가운 손이 내 뺨을 만졌다. 흠칫 물러나서, 그를 보았다. 굳은 얼굴. 어째서. 어째서 그런 눈으로, 알 리 없는 이 곳에 그가 있는가.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쥐었다.

그가 저런 눈으로 날 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단 한번도 그는, 저런 눈으로 날 보지 않았다.

화내고 있는 건가. 연락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가 이나영이 재회 이후 다시 공식 커플처럼 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기를 바란다고? 그에게 나는, 그런 거라고?

따뜻하게 귓불에 키스한다. 차가운 손이 어깨를 쥐고 있더니, 그는 내 얼굴을 음미하듯이, 어루만지듯이 키스하고 내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내 입술을 쓰다듬는다. 조심스럽게 그 입술에 그의 입술이 닿는다.

“원진희!”

그가, 가슴을 더듬으며 나를 감쌌다. 그를 밀어낸다. 아니, 안 돼. 이제 더 이상은 싫다고. 더 이상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와 함께 있고 싶지 않다. 나는…, 나는….

그는 물러나는 대신 허리띠 버클을 끌렀다. 소스라치게 놀라 뿌리친다. 철썩, 그의 뺨이 붉었다. 아아, 때리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물러났다. 돌아가, 돌아가. 제발, 나를 무너지게 하지 마. 너에게 더 이상 나를 휘말리게 하지 마.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옷을 끌어올리고, 끌어내렸다. 서늘하다. 병실은 춥지 않은 온도인데도, 살갗에 닿는 그의 손가락이 차갑다. 몇 번이고 밀어내고 버둥거려도 그가 나보다 힘이 세다. 그가 젖은 입술로 내 가슴에 입맞추고, 내 다리를 적셨다. 뚜욱, 하고, 다른 것이 떨어졌다.

그가, 울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의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로,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이 열중해 있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째서, 어째서, 너는 이렇게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데. 어째서.

그는 한참만에 몸을 떼었다. 내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다시 내게 입맞추지도 않았다. 다만 그 붉은 눈을 하고 일어나서,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병실 문이 닫혔다. 벽에 등을 기댔다. 드러난 등으로 차가운 병실 벽이 닿는다.

그렇게 차가운 손을 하고서, 그렇게 아픈 눈을 하고서, 날 보고 어쩌라는 거야. 혼란스럽게 하지 말아줘.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는 ....

응, 원진희. 날, 사랑해?
2005/11/20 16:15 2005/11/20 16:15
trackback : http://tripfar.net/blog/note/trackback/10
[로그인][오픈아이디란?]